'교육'에 해당되는 글 131건

  1. 2009.10.02 독수리
  2. 2009.10.01 자우림 <낙화(落花)>
  3. 2009.09.30 정민「미쳐야 미친다」
  4. 2009.09.30 레이첼 카슨「침묵의 봄」
  5. 2009.09.30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오래된 미래」
  6. 2009.09.30 최재천「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7. 2009.09.30 허병두 「너희가 책이다」
  8. 2009.09.28 헤어스프레이
  9. 2009.09.27 조상희「생활 법률 365가지」
  10. 2009.09.27 김주하「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11. 2009.09.27 고유어 지명 모음
  12. 2009.09.26 마하트마 간디, 고병헌 옮김「간디, 나의 교육철학」
  13. 2009.09.26 김장희 '요롱이'
  14. 2009.09.26 「지식 e」
  15. 2009.09.26 비카스스와루프 「슬럼독 밀리어네어」
  16. 2009.09.25 디브라운「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17. 2009.09.25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18. 2009.09.25 제윤경, 「부자들의 행복한 가계부」
  19. 2009.09.25 교과서에 나오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20. 2009.09.25 가브리엘 루아,「내 생애의 아이들」, 현대문학
  21. 2009.09.25 미디어 고등학교 목록
  22. 2009.09.25 타루 <Love Today>
  23. 2009.09.25 향기
  24. 2009.09.25 미안하다 아이들아
  25. 2009.09.13 [발표문] 판타지도 문학인가?
  26. 2009.09.13 <빌리 엘리어트>는 과연 해피 엔딩인가?
  27. 2009.09.13 일상에서의 운동 / 박노자『당신들의 대한민국』
  28. 2009.09.13 [수필]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29. 2009.09.12 [논문] 아동의 버릇 고치기와 관련된 교육 문화
  30. 2009.09.12 해웃음 <어릴 때 내 꿈은>

_ 문진영(고양예고 3학년)
_ 내가 약간 수정함.


  독수리가 되고 싶다,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한번도 뭐가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또래 아이들이 한번쯤 막연히 꿈꿔보는 연예인이라는 것도 말이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커서 뭘 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땐 모두들 웃고 넘겨버렸다. 물론 나종차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고2 겨울방학을 흘려보개고 있는 지금, 남들보다 뛰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너무도 엉뚱하게 독수리가 되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을 많이 배웠지만, 두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도레미파솔을 치는 게 가장 쉽고 재밌듯 내가 배웠던 태권도나 기타도 그랬다. 기본 동작을 배우며 설레거나 아주 쉬운 것을 해냈을 때의 뿌듯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어려워지는 동작이나 멜로디에서 헤매다가 결국엔 학원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시작하는 것이 너무 쉬웠던 것만큼 포기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장래 희망이 없다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학년은 올라갔고, 오히려 고학년이 된다는 것에 더 끌렸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최선을 다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외워야 할 동작이 맣아지고 오선지에 띄엄띄엄 걸려있던 음표들이 빽빽해지면, 몇 번 해보지도 않고 덮어버렸다.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답답하고 손가락이 아프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해보겠다, 라는 의지가 없었고 모든 걸 금방 질려하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었던 것 같다.
  독수리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실제로 독수리를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본 게 전부였다. 절벽 끝 바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빠졌다. 그러다 산 중턱에 사슴 몇 마리가 지나가면 빠르게 한 마리를 낚아채 산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렇게 죽은 사슴을 다시 잡아 절벽에 있는 둥지로 돌아간다. 프로그램의 해설자는 독수리의 사냥법이 아주 기막히다고 말했다. 땅에서 다른 동물들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무서워하지만 어떻게 보면 동물의 왕은 독수리일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 몸통의 두 배만한 날개를 펄럭이며 새들 중에 가장 높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나는, 부러웠다. 공부는 물론 어느 것 하나도 잘하는 게 없다고 좌절하던 나에게, 태어날 때부터 사냥에 유리한 발톱과 부리, 그리고 크고 힘센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부러울 수밖에.
  나는 그렇게 막연히 독수리를 부러워했다.
  어느날, 케이블 채널에서 불법으로 야생동물을 생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봤다. …<중략>…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 사납고 그만큼 힘이 세죠. 하지만 이렇게 강한 독수리가 되기까지 독수리는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독수리의 강한 모습만 기억할 뿐 그 뒷면은 알지 못하죠.
  독수리는 나이가 들면 부리와 발톱이 구부러져 더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때에 이르면 독수리는 바위에 부리를 찧어 부스러뜨리고, 새로운 부리가 돋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약 150일 정도가 지나고 부리가 새로 돋으면 독수리는 자신의 깃털과 발톱을 뽑아 버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지요.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독수리는 강해질 수 ……."
  내레이션이 아주 점잖은 모솟리로 내 귀에 들어왔다. 독수리가 큰 눈을 껌벅이며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독수리의 눈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깊어 보였다.
  독수리가 되고 싶다. 그 어떤 것에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는 나에게, 조금만 힘들어지고 버겁게 느껴지면 금방 포기해 버리는 나에게 독수리는 아주 좋은 본보기이다. 독수리는 자신의 발톱과 부리가 구부러져 굶어 죽게 되어도, 부리를 바위에 찧으면서까지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런 반면 나는 항상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툴툴거리기만 했다. 그러면서 다른 새들보다 더 높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만 했다.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찧으며 느끼는 고통이나 인내를 겪어본 적도 없고, 더 높이 날기 위해 몇 번을 뒤뚱거려 보지도 않았으면서…….
  독수리처럼 살고 싶다. 툭, 하고 내게 던져진 것만 받아먹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대가를 얻고 싶다. 독수리가 날기 위해 뒤뚱거리는 것처럼, 어려운 걸 틀려보기도 하고, 몸에 익숙치 않아 넘어져 보면서 배워 나가고 싶다. 한번에 높이 오르는 걸 바라기보다는 천천히 날개짓을 하며 좀더 높은 곳을 날고 있는 나를, 꿈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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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들 잠든 새벽 세 시 나는 옥상에 올라갔죠
하얀색 십자가 붉은빛 십자가
우리 학교가 보여요
조용한 교정이 어두운 교실이
엄마 미안해요

아무도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어요
아무런 잘못도 나는 하지 않았어요
왜 나를 미워하나요
난 매일 밤 무서운 꿈에 울어요
왜 나를 미워했나요
꿈에서도 난 달아날 수 없어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 두세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 두세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 두세요


모두들 잠든 새벽 세시 나는 옥상에 올라갔죠
하얀색 십자가 붉은빛 십자가
우리 학교가 보여요
내일 아침이면 아무도 다시는 나를.. 나를...


:

 
미쳐야미친다
저자 : 정민 | 출판사 : 푸른역사(도)
2004.04.03 | 333p


1부 벽에 들린 사람들
미쳐야 미친다 - 벽에 들린 사람들
굶어죽은 천재를 아시오?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독서광 이야기 - 김득신의 독수기와 고음벽
지리산의 물고기 - 책에 미친 바보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 박제가와 서문장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 노긍의 슬픈 상상

2부 맛난 만남
이런 집을 그려주게 - 허균과 화가 이정
산자고새의 노래 - 허균과 기생 계랑의 우정
어떤 사제간 - 권필과 송희갑의 강화도 생활
삶을 바꾼 만남 - 정약용과 강진시절 제자 황상
실내악이 있는 풍경 - 홍대용과 그의 벗들
돈 좀 꿔주게 - 박지원의 짧은 편지
노을치마에 써준 글 - 가족을 그린 정약용의 편지

3부 일상 속의 깨달음
연기 속의 깨달음 - 이옥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그림자놀이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천하의 지극한 문장 -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 -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허균의 생각
세검정 구경하는 법 - 정약용의 유기 세 편
:

 
침묵의봄
저자 : 레이첼카슨 | 출판사 : 에코리브르
2002.04.10 | 384p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일컬어지는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였다. 언론의 비난과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는 화학업계의 거센 방해에도 불구하고, 레이첼 카슨은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인식을 이끌어 내며 정부의 정책 변화와 현대적인 환경운동을 가속화시켰다. 즉,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환경 문제를 다룰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69년 미국 의회는 국가환경정책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암연구소는 ddt가 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발표하였고, 각 주들은 ddt의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침묵의 봄]을 읽은 한 상원의원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자연보호 전국순례를 건의 했으며, 이를 계기로 지구의 날(4월 22일)이 제정되었다.

출판사 서평



''환경''이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등장함으로써 그에 따른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고의 환경 도서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일컬어지는 <침묵의 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당히 부족한 형편이다.

지금도 시커먼 매연이 오염시키고 폐수가 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농약과 제초제라는 이름으로 독극물이 마구 뿌려지고 있다. 이것이 순간적인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연을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인간에게 결국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은 자명하다.

1962년에 띄어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이러한 우리의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은 들판에 뿌려지는 유독성 화학물질과 미국 야생 생태계의 광범위한 파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유독물질에 관한 책이다. 자연생태에 관한 것이며 환경과 동식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동물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이는 곧 아무리 인공적인 환경에서 살아도 자신의 기원인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여기에 실린 수많은 실례들은 비단 미국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남의 나라 얘기라고 흘려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일고 있는 유기농 채소 붐이 이를 반증해준다. 그것은 단순한 봄이 되어서는 안되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생존의 문제임을 깊이 깨닫고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길이다.
:

 
오래된미래
저자 : 헬레나노르베리호지 | 출판사 : 중앙북스(주)
2007.11.15 | 354p



 
어린이를위한오래된미래
저자 : 헬레나노르베리호지,박희은 | 출판사 : 중앙북스(주)
2008.10.24 | 213p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현대의 고전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의 어린이판!


1992년 발간 이후 전 세계 5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사랑받는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의 어린이판. 원작의 감동은 그대로지만 등장인물과 설정을 창작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췄다.
현대의 어린이들은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 생활하고 있다. 무엇이든 경쟁해야 하고,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환경 속에서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진정한 행복은 가족과 친구와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고, 자연이 주는 작은 선물에도 감사하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나온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분명한 목표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본문의 구성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에서는 엄마를 찾아 라다크로 날아온 꼬마 소녀 헬레나가 또래 친구 돌마와 그의 가족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2부에서는 라다크에 불어 닥친 서구화의 물결 속에 돌마네 가족이 도시 ‘레’로 이주해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개발이나 문명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3부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것과 경제개발이라는 대조적이지만 버릴 수 없는 두 개의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반개발이 아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의 내용
히말라야의 깊고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라다크! 까칠한 성격의 스웨덴 소녀 헬레나가 인도의 라다크까지 왔다. 이혼한 엄마에게 잔뜩 화가 나서 따질 게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올 때는 엄마와 함께 금방 떠날 셈이었다. 그러나 라다크는 헬레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라다크 소녀 돌마와 돌마의 가족이 베풀어준 따스한 사랑과 배려 속에 불편하기만 했던 라다크의 생활은 점점 아늑함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이곳에서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법, 자연을 아끼는 법,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되었고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라다크의 지혜는 헬레나에게 행복을 선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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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있는것은다아름답다
저자 : 최재천 | 출판사 : 효형출판
2001.01.20 | 267p


제게는 늘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으로 이 글들을 썼습니다.
죽는 날까지 줄곧 동물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그리렵니다.
그러다 보면 생명도 제 앞에서 하나둘씩 옷을 벗고 언젠가 그 하얀 속살을 내보이겠지요.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출판사 서평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이자 여러 언론 매체에 활발하게 글을 발표하고 있는 저자 최재천에게는 늘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알고 나면 크고 작은 것의 차이, 귀하고 하찮은 것의 차이, 예쁘고 못난 것의 차이 없이 모든 생명이 그 생명의 존재만으로도 사랑할 만한 의미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는 과학자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인문의 향기가 담겨 있다. 조각가를 꿈꾸었고, 아직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 한켠에 묻어둔 때문일까? 여느 과학자들의 글과 달리 그의 글들은 짧지만 힘이 있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반면에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최근 한 시사 월간지에서 지난 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쟁이에 그를 선정한 사실만 봐도 그의 글이 얼마나 독특한지 특별한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책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한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줄곧 개미와 꿀벌, 거미와, 여러 종류의 새들, 물고기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세계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동물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동물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세계를 투영하였다.

''개미 박사''로 알려져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도 개미들의 사회를 아주 사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록 몸집은 작지만 지구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놀라울 정도로 조직화된 그들의 사회를 통해 우리 인간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동물들에 대한 재미 있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담고 있는 한편 동물들의 삶과 사회의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본 인간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또한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동물들도 남의 자식을 입양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신의 아이를 버리는 세태에 대해 개탄하며, 거미들의 지극한 자식 사랑을 한 예로 들어 조금 살기가 어려워졌다 하여 가족 간의 희생과 사랑을 상실해가는 우리네 가족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위험에 빠진 동료 고래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고래들의 따뜻한 동료애에 비해 주위의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배려도 베풀고자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또한 남녀의 역할 분담과 가정과 사회에서의 중요도에 그 차이가 없는 동물 사회에 비해 아직도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를 갖고 있는 우리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장 ''알면 사랑한다''에서는 가시고기의 진한 부성애와 꿀벌 사회의 민주주의, 동물 세계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의식과 권력 다툼 등을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 장 ''동물 속에 인간이 보인다''에서는 동물 사회의 열린 경쟁과 동물들의 성(性)에 따른 역할 분담 등을 담고 있다. 또한 세 번째 장 ''생명,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는 호주제 등의 그릇된 인간 사회의 관습을 꼬집으며 동물 세계와 비교한다. 아울러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새들의 감동적인 모습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장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꾼다''에서는 왕따와 이기주의가 사회문
:
이분 책따세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시죠^^
:

오늘 공씨네 통해 들은 영화...
좋을 것 같다^^
나가서 다운받아 보자아~

헤어스프레이


개봉 2007년 12월 06일
감독 아담 쉥크만
출연 니키 브론스키 , 존 트라볼타 , 미셸 파이퍼 , 크리스토퍼 월켄 , 아만다 바인즈 , 퀸 라티파 , 제임스 마스덴 , 브리타니 스노우 , 잭 엘프론 , 엘리아 켈리
상영시간 115분
관람등급
장르 뮤지컬 , 코미디
제작국가 미국
제작년도 2007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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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 할부 판매
286> 노동
360> 학교의 책임
361> 의사의 설명 의무
364> 집단 소송
380, 382, 384, 388, 390, 392> 생활 환경 피해
440> 전과 기록 말소 / 조회 제한
448> 불심 검문
490, 492, 496> 보험

* 처제와의 결혼, 가능한가요? - 토론 꺼리

1. 근친 상간에서 '근친'의 개념 - 촌수의 개념 가르치기

2. 근친 상간의 찬반 이유 / 반대에 대한 반론
  2.1. 옛날, 타지방에서는 근친 상간이 허용/장려되는 문화가 있었다.(가족 책임지기)
  2.2. 문화의 상대성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나?

3. 각자의 가치 판단 기준(도덕 판단 기준의 다양성, 위계-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6단계)
  3.1. 인륜
  3.2. 사회적 시선, 문화, 관습
  3.3. 법률
  3.4. 공리주의 : 당사자에게는 도움이 되고 타인에게 피해만 없으면 옳은 것.
  3.5. 기타 다양한 이념, 종교

4. 법률의 기능
  : 소극적인 최소, 최후의 기준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판단하는 정책인가?
:

2009.08.29 09:03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꿈이
김주하 아나운서같은 아나운서라고 한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들으며,
그리고 그 꿈을 위해 함께 얘기하고 상상하고 준비해보며,
나도 김주하 아나운서를 알고 싶었다.


이런 게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 줄탁동시(啐啄同時)?^^ㅋ


위의 글은 이 책 읽기 전에 미니홈피에 올린 글.


이 책을 읽고, 자전적 에세이의 가능성을 보았다.

특히 자신의 성장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


141~>
꿈, 직업을 결정하는 데 그리 거창한 동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우연, 사소함, 방황, 순간의 선택, 51%의 기욺, 실수, 사고, ......
이런 것들이
인생을 만들어 간다.



 
안녕하세요김주하입니다
저자 : 김주하       | 출판사 : 랜덤하우스코리아(주)구 랜덤하우스중
2007.07.02 | 296p
:
오늘 우연히 잡지 「풋,」 읽으면서
春川의 고유어 지명이 '봄내'라는 것을 들었다.

봄내,
봄내





발음할 수록 너어무 예쁘다.
이런 지명들이 왜 춘천이라는, 딱딱하고 흐린 한문으로 바뀐 걸까?
(춘천...하면 무언가 밝지 않고 흐리고 희뿌옇고 그늘지다. 춘천호의 이미지 때문에? 아니면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 때문에?)



생각난 김에 고유어로 된 지명 찾아봤다.
혹시나 알고 있는 고유어 지명 있으면,
올려주시길.
(가능하다면 지금 지명이랑 비교해서^^)

                                                                                                     

벌말(현재는 평촌)
빛고을(현재는 광주)


지하철역명 : 보라매(7), 버티고개(6), 장승배기(7), 굽은다리(5), 독바위(6), 선바위(4), 광나루역(5), 돌곶이(6), 당고개(4)
:
23> 그러나 이렇듯 교육열이 매우 뜨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66> 그런데 내가 제안한 이런 식의 초등교육을 충실하게 계획하고 즉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위원회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오직 한 가지, 나와 같은 강한 신념 뿐이다.

70> 글자에 의존하지도 않고, 또 정규 수업 방식이 아닌, 오로지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쳐 보라.

78> 어린이 교육에 대한 기본적 생각

134> 생산적 작업

239>
- "모순이 없는 사람은 어린아이밖에 없다."
- 나는 현재 내게 진리로 보이는 것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 간디는 스스로 만든 원칙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였던 것이며, 이는 그가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는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40> "비겁과 폭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라면,
         나는 폭력을 선택하겠다."
:
우연히 TV에서 본 짧은 애니...
(아마 '상상초월 마이애니 http://ytndmb.com/mytn/program_list.php?s_mcd=36 에서 본 듯)
근데 되게 좋았다.

찾을 수 있을까?


■ 애니파워 인터뷰 <'요롱이' 김장희>

< 요롱이 >

김장희 / 2D / 코믹 / 경기대학교

긴 허리 때문에 매사에 소심하고 따돌림을 당하던 요롱이. 어느 날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열리고, 오직 요롱이만이 해 낼 수 있는 종목이 등장하는데...

"외모만이 사람을 판단하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마음먹기에 따라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 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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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필요없다.
꼭 읽어야 할 교양서!



 
지식E
저자 : EBS지식채널 | 출판사 : 북하우스(주)
2007.04.09 | 351p
:
“나는 체포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
한밤중에 난데없이 경찰에 잡혀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아시아 최대의 슬럼가’, 다라비(dharavi). 어느 날 밤, 열여덟 살의 가난한 웨이터 람 모하마드 토머스가 새로운 희생양으로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죄목은 tv 퀴즈쇼에서 우승을 했다는 것.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 없는 보잘것없는 하층민이 속임수를 쓰지 않고서야 십억 루피가 걸려 있는 퀴즈쇼의 까다로운 문제를 모두 맞힐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상금을 모두 지불할 능력이 없는 퀴즈쇼 제작진들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 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 순간, 한 여자 변호사가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람은 퀴즈쇼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자신이 모든 문제를 맞힐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나간다. 각각의 문제는 우연히도 모두 람의 삶과 연관돼 있었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과 함께 그의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슬럼독밀리어네어(Q & A)  
저자 : 비카스스와루프 | 출판사 : 문학동네.
2009.02.15 | 455p
:
148~164> 샤이엔족에 대한 샌드크리크 학살

330~335> 투산 원정대의 아라바이파 마을 학살

432~438> 팰로 듀로 협곡에서의 학살

566~579> 퐁카 족에 대한 진전된 판결, 그러나 무시와 학살

689~696> 운디드니 학살

+ 각 장의 처음 부분에 있는 원주민들의 말 / 사진들
:
역사를 새로 쓴 소설
우리말과 한글의 소중함도 깨우쳐준다.
:
나의 경제관념에 매우 도움이 된 책.
:
조세희
황지우
김정한
김성한
채만식
박지원
카프
황석영
오정희
이청준
:
교사 이야기.
내 현실과 다르면서도 또다른 영감을 주는 글


* 찬 물 속의 송어

* 종달새

* 282쪽부터 나오는 평론. 좋은 평론의 예가 될 수 있다.
:

이화여대병설 미디어고등학교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위치, 미디어특성화 고등학교, 인터넷, 영상미디어 등 수업 안내.
http://www.ewhamedia.hs.kr/
02-2209-0146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1동 220


은평웹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위치.
http://eunpyeong.cschool.net/

한강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4가 위치.
http://www.hangang-ech.hs.kr/


예산정보미디어고등학교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위치.
http://www.ygc.hs.kr/

상일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위치, 특성화고등학교 소개.
http://www.sangilmedia.hs.kr/


선린인터넷고등학교 멀티미디어과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위치.
http://www.sunrint.hs.kr/wiz/wizard/frames/server_index.htm ...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경기도 안산시 와동 위치.
http://www.dimigo.hs.kr/
031-439-5578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산27-1

여우사이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방송국, 방송일지, 사연, 신청곡, 다시듣기 등 제공.
http://cast.dimigo.kr/

:
예뻐져라 예뻐져 예뻐져라 예뻐져
거울 속에 속삭여 가장 환하게 웃어
이젠 새로워질 걸 나는 소중하니까
이제 눈을 뜨면 난 피어 날 테니까 봐
늦게 잠 드는거 오 그만 단 거 먹는 것도 오 그만
혼자 우는 것도 오 그만 쓰게 먹는 커피 오 그만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 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 걸 바꾸네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 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 걸 바꾸네

예뻐져라 예뻐져 예뻐져라 예뻐져
가슴 너무 뛰는 걸 뭐든 다하고 싶어
예쁜 옷 사러 갈까 음악에 취한 채 난
사랑스런 모션은 더 크게 달콤하게
밤새 컴퓨터도 오 그만 아침 거르기도 오 그만
전화 기다리기 오 그만 괜히 상처받기 오 그만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 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걸 바꾸네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 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 걸 바꾸네

꿈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주문을 외워 믿는 그대로
꿈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주문을 외워 믿는 그대로
꿈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주문을 외워 믿는 그대로
꿈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주문을 외워 믿는 그대로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걸 바꾸네
소용돌이치는 무지개 가슴 터질 듯한 향기가
내 몸을 감싸고 모든걸 바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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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

2009. 9. 25. 18:28
한 아이가 보내준 향기가 있었다.
그리 고급스럽진 않은, 딱 그 아이가 보낼 만한 향수. 그 때 참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1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동안 향기는 봉투에 곱게 싸여 진주에서 수원까지 왔다. 문득 생각이 나 오랜만에 열어 보았을 때... 향기는 조금은 옅어졌지만 숙성했고, 다른 편지에까지 묻어나/번져/물들어 있었다.
농도를 조금 낮추어,
주위를 멀리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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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구운중학교 수학멘토링 2학년 5반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느낀 것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아이들을, 5명만 모여도 서로 다른 흐름과 성향을 지니는 아이들을, 40명을 모아서 일률적인 시공간 안에 가두어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학교는 아이들에게 충분히 미안해해야 한다.

  그 미안함을 잊지 말자. 학교에서 가능한 변환 프로그램을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 틈새를 뚫어야 한다.
:
_ 2001년 11월 20일 화요일 오전 8:47:50
아마 수업시간 발표 준비문 같음;;


판타지도 문학인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즐겨 읽히고 있는 장르가 바로 판타지 소설일 것이다. 이우혁의 『퇴마록』,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등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고, 이제는 서점에서 한 코너가 판타지 소설로 채워져 있을 정도로 양에서 결코 다른 장르와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편으로 판타지 문학을 문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재미만 추구하고 시류에만 영합하는 판타지는 결코 격문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판타지의 문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봄으로써 지금 범람하고 있는 판타지의 홍수에 제대로 물길을 터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판타지가 재미만 다룬다는 명제에 대해 가부를 가려보자. 물론 판타지 소설 중에는 흥미적 요소만을 담고 있는 작품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다수의 판타지 소설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판타지는 장편이 대부분이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제시되는 삶의 진리를 총체적으로 보여 줄 수도 있다. (특히 이영도의 『퓨처워커』)
혹자는 판타지가 허구 중의 허구,
있을 수 없는 허구라는 점을 지적하며 거기에서 어떻게 진실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판타지는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판타지는 배경, 인물, 사건에서 현실에 없는 것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 완전히 현실에서 동떨어져 현실적 삶의 법칙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작가의 창조적 역량이 최대한 발현되므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전달하기에 더 나을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 90년대 작가들 중에서 백민석 같은 작가는 판타지적 단편소설을 써 내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나무개』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어떤 박물관에 나무 위에 사는 개가 있다는 것을 시작을 그 개에 대한 이미지들을 풀어내고 있다. 사실 대중적 판타지 소설보다 더 황당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이런 본격작가들의 판타지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타지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판타지는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름대로 삶에 대한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꽤 많이 있다.

그리고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장점은, 사람들의 소망을 실제로 구현해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법이나 환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다.(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런 불가능함을 판타지는 과감히 깨어버린다. 그럼으로써 판타지는 독자의 소망을 실현시켜준다.

(요건 시간 남으면 말하기..) 판타지는 그 나라 신화를 대중화하는 데 충분한 기여를 한다. 서양의 예: 애니매이션 헤라클레스, 북구 신화를 기본으로 한 유럽형 판타지물들, 그 외 다수.

※굵은 글자: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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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2005.5.4 지음


<빌리 엘리어트>는 과연 해피 엔딩인가?

 

까만

 

지난 월요일에, 애들이 하도 안와서 결국 <빌리 엘리어트>를 봤다. 예상한 대로, 아이들은 “남자가 무슨 발레?”라고 비웃고, 영화 속의 동성애적인 코드에 거부감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만큼 나는 더욱 영화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함께할 수 있을까?

 

1. 빌리를 둘러싼 것들, 그리고 빌리.

빌리 엘리어트는 주인공 빌리의 성장 영화이다. 그러면 빌리는 처음에 어떤 공간에서 어떤 아이로 살고 있었나?

영화는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빌리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은, 탄광의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다. 즉 빌리는 전형적인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노동 계급’이라는 말 속에는 단지 가난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만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빌리의 집안은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이러한 남성 노동자의 전형(全形)이다.

그러나 빌리는 아버지, 형과 어느 정도 다르다. 물론 빌리 역시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져 온’―남성성의 대물림이 너무 잘 드러나지 않는가?―복싱을 배우고 있지만, 빌리는 복싱에 만족하지 않는다. 빌리는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가 남긴 피아노를 친다. 빌리는 복싱을 할 때도 마치 춤을 추듯, 리듬과 스탭을 탄다(물론 그러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2. 발레의 이중적 의미

빌리가 발레를 만나면서, 빌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문화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복싱을 그만둔 것, 그리고 발레를 둘러싼 아버지․형과의 갈등은 빌리의 저항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남자가 어떻게 발레를!”이라고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단지 빌리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빌리의 발레 교사인 윌킨슨 부인이 빌리에게 “너의 춤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빌리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져온다. 즉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은 빌리의 집안에서 대대로 억압되어 왔던 여성적 문화가 드디어 스스로를 드러내고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화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발레의 의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영화를 주의깊게 본다면, 발레가 영화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혹시 기억나는지?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장면과, 빌리의 아버지와 형이 고함을 지르면서 파업하는 장면이 교차되는 씬을. 영화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빌리와,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빌리의 아버지․형을 대비시킨다.

발레는 여성적 관점에서는 해방이지만, 계급적 관점에서는 억압이 된다. 그것은 빌리가 발레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윌킨슨 선생의 계급적 성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발레 교사는 매우 부유한 집안이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쓸데없는 행동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빌리의 형이 발레를 반대할 때, 빌리의 형에게 “빌리를 당신같은 꼴이 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상류층 문화인 발레는 빌리가 기반하고 있는 노동자 문화와 충돌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문화적 충돌을 넘어서, ‘마음 편히 발레에 집중할 수 있는 가정 환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이이다. 윌킨슨 선생은 계속 빌리에게 “너는 집중하고 있지 않아.”라고 꾸짖는다. 어떻게 빌리가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와 형이 파업으로 힘들어하고, 형이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3. 빌리에게 주어진 발레, 빌리에게서 나온 발레.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빌리가 자신의 분노와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이 다시 ‘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때 ‘춤’은 ‘발레’와 다르다. 빌리가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추는 춤은 왕립 발레학교에서 요구하는 고품격의 우아한 발레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춤이다. 그래서 빌리가 즉흥적으로 추는 춤은 기존 발레와 다른, 빌리 자신의 몸짓이 들어간 춤이 된다.

빌리가 자연스럽게 발출하는 춤. 이것은 앞에서 빌리에게 ‘주어진 발레’가 가지는 이중성을 극복할 단초가 된다. 빌리에게 춤은 단지 상류층의 유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강제되는 억압을 극복하고 그것을 해방적 힘으로 발현하는 원동력이다. 아마 빌리가 조금 더 의식 있는 발레 교사에게 배웠다면, 빌리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춤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윌킨슨 선생은 빌리의 노동계급적 속성을 긍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빌리를 왕립 발레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빌리도 빌리의 가족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윌킨슨 선생은 빌리의 자발적인 ‘춤’을 왕립 발레학교라는 기존의 상류층 발레로 포섭해 버린 것이다.

 

4. 영광, 그 이면의 패배

그리고 영화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내가 ‘파국’이라고 쓴 표현에 의아해할 것이다. 빌리는 왕립 발레학교에 합격했고, 영화 마지막에는 <백조의 호수>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는 감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그런데 무슨 파국?

그렇다. 빌리는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어떻게 되었나?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를 위해 회사의 압력에 굴복해 버렸다. “우리 꼴을 봐라, 빌리마저 망칠 수는 없다.”고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그리고 빌리를 더 높은 계급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빌리에게는 기회를 줘야 해.” 이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바로 한국의 무수한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식들을 키우면서 한 말이다. 너희들에게는 기회를 줄게, 우리가 희생해서라도 너희는 잘 살아야 해.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인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라난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를 가는 것이 그 탄광 마을 전체의 경사가 되는 장면. 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마치 시골 깡촌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학생 한 명 생겼을 때의, 온동네가 잔치를 하는 그런 분위기. “빌리가 해냈어!”라는 환호와 “노조가 졌어.”라는 탄식이 교차될 때,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패배를 본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문화 자본의 차이는 더욱 크게 드러난다. 생전 처음으로 런던에 가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진 탄광밖에 몰라요.”라고 말하는 빌리. “한 번 떨어져도 내년에 또 하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부자 아이들과, 그 아이에게 주먹을 날릴 수 밖에 없는 빌리.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휘두른 빌리에게 품위와 규율을 강조하고, “가정의 절대적인 지원”을 강조하는 왕립 발레학교 심사위원들. 그런 문화 충돌 속에서, 빌리와 그의 가족들은 결국 상류층 문화에 편입되는 것을 선택한다. 아니 갈구한다. 처음에는 단지 좋아하는 발레를 하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나중에는 왕립 발레학교라는 명문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된다. 개인적 꿈이 사회 체제 안으로 너무나도 쉽게 포섭된다.

 

5. <빌리 엘리어트>는 과연 해피 엔딩인가?

영화는 빌리의 화려한 데뷔에서 정지하며,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으로 암전(暗轉)한다. 그러나 영화를 10분만 더 이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 탄광에서 올라온 빌리 아버지․형과, 상류층의 우아한 주인공인 빌리의 어색한 만남? 짧은 만남 후에 빌리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저택으로, 아버지와 형은 다시 탄광촌으로?

그것이 과연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결말일까?

 

어쩌면 감독은, 절망적 결말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싫어서 영화를 멈춘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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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0) 2009.09.06
:
_ 2002.7.21 지음


일상에서의 운동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방금 서점에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끝내고 왔다. 다리 아프다…….

  이 책에는 대학,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해 잘 비판해놓고 있었다. 특히 대학 내부에서의 권력 문제를 읽으면서 정말 권력에 의한 착취는 어디에나 다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고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특히 많은 생각을 한 부분이 민족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박노자가 돈 잘 벌고 어쩌고 하며 표현한 작가의 책을 나오는 족족 사읽던 학창시절을 겪은 나였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정적 민족주의자 또 국수주의자였다. 물론 작년 말에 그 생각을 바꾸기는 했지만. 특히 윤관의 여진 정벌을 말하면서 그에 짓밟힌 소위 오랑캐들의 삶을 생각하자는 대목에서는 진짜로 뜨끔했다. 아직까지도 광개토대왕 하면 열광하던 나였으니…….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노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겪었다. 우리나라와는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 사회를 겪은 박노자다. 우리나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더 직시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나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구애받지 않고 비판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특히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대한 비판에서, 나는 이 글은 우리나라 사람은 못 쓸 글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박노자는 일상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 조교사건(?)을 겪고 그가 그날 밤에 했다는 생각―사회주의자라면 그런 행동에 대해 그 때 바로 문제제기를 했어야 했다라는―은 내게 일상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과연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의 일상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어떤 일이든 이면을 생각하라는 구절이었다. 한쪽이 승리하면 패배하는 쪽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 어쩌면 너무나도 이상적일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분명히 옳은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감상을 체계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냥 산발적으로 내 생각을 그대로 썼다.
 
미진한 글이나마 솔직함으로 포장하면서 글을 매듭짓는다.

:

- 2003.9.26. 지음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국어교육과 홍수봉

  혹시나 비가 오지 않으려나 조마조마 했다.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목 길게 빼서 골목길을 확인했다. 다행히 환한 햇빛을 받고 있다. 작년에 열린교실 기간 내내 비가 왔다갔다 해서 야외수업 한번 제대로 못한 게 서운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한다. 대학 강의에는 9시 수업에도 종종 지각하는 나이지만, 중학생들 앞에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서야 하는 일주일만은 8시 등교도 시간 정확히 맞춰서 가야한다. 아이들은 절대로 지각하지 않는다.

입학식장이 좁은 실내라서 붐볐다. 학생들 자리 잡아 앉히랴, 모둠 선생님들 빨리 오라고 연락하랴, 게다가 입학식 사회자까지 맡은 나였기에 정신없이 식장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시작인데, 또 늦겠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나를 향해 “선생님!!”이라고 외쳤다.

아직 학생들 모둠 선택도 안했는데 누가 나를? 그렇게 돌아본 내 눈에, 큰 키에 까무잡잡한 한 아이가 보였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또 국어 모둠 들어가려고 왔어요!!!”

한민이였다.

작년에 처음으로 열린교실 교사가 되었을 때, 딱 세 명의 아이들이 국어 모둠을 선택했다. 그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선생님들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가끔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 오빠로 불러서 애정 어린 주의를 받곤 했던 중학교 2학년 여학생. 한민이는 1년 전 그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심지어 옷차림까지 똑같았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바빠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기뻤다. 학 학생과 두 번째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감동을 준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신없이 입학식이 끝나고, 오후부터 모둠별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사범대로 올라가는 길에 한민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1년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 지난번에 함께 했다가 이번에는 같이 못하게 된 선생님들 얘기, 한민이 학교 얘기,…….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진학 얘기가 나왔다.

“너희는 평준화지? 좋겠다. 나는 중학교 때도 야자 했는데……. 넌 어느 계열로 가고 싶어? 인문계 아니면 자연계?”

“선생님, 전 실업계 가고 싶은데요.”

“…… 응?”

“대학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빨리 취직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일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아…그래……?”

말꼬리를 슬그머니 흐렸다. 그렇게 얼버무리는 동안, 내 생각은 5년 전 다녔던 XX 중학교 3학년 8반, 어느 가을의 종례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성적이 이것밖에 안되는데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겠다고? 넌 절대로 합격 못해!

― 정 니 뜻이 그렇다면, 고등학교 떨어지더라도 선생님은 아무 책임 없이 전적으로 네 책임이며, 재수도 하지 않고 실업계로 진학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그렇지 않으면 원서 도장은 없다.

― 오늘 숙제 안해온 사람 청소한다. 누구지? 어, 반장도 안 해왔어? 웬일이니 니가? 그럼…… 어이, 실업계 가는 놈들 일어나. 오늘 청소는 너희들이다.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실업계’라는 이름은 인간적 낙오를 의미했다. 실업계에 가는 내 친구들은 선생님께도 ‘인간 취급’을 받지 않았다. 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 취급’을 받기 위해서 악을 쓰고 공부를 했고,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울대로 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한 학생이 “실업계가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업계를 가면 네가 나중에 살아가는 데 제약이 너무 많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못할 수도 있다, 대학을 나오는 게 네 꿈을 이루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조차도 뜻을 잘 모르고 있는 말들을 그냥 내뱉어 놓았다.

한민이는 가만히 듣더니, 한마디를 했다.

“사람들은 왜 대학을 가지 않으면 틀린 길을 걷는다고 말할까요? 그냥 제가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길을 걷는 거라고 말해줄 수는 없나요?”

그날 나는 한민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시간은 동시에, 다르게 흘러간다. 내가 시간 속에서 무언가에 매진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것을 다 이루어놓고 잠시 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시간은 매우 빨리 흘러있다. 그리고 열린교실도 ‘매우 빨리’ 끝났다.

 

졸업식 끝나고 학생들과 팥빙수를 먹으러 갔었다. 일주일간 함께 했던 기억들을 팥빙수 하나에 녹여 먹으면서, 나와 한민이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억을 먹어두려고 숟가락 싸움을 했었다. 그렇게 몸 속에 담아둔 기억들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든다. 컴퓨터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2002 열린교실 주소록]과 함께.

거의 반 년 만에 듣는 목소리. 그동안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소심함을 미안하다는 몇 마디로 풀어내면서, 넌지시 고등학교에 대해 묻는다. 학교요? 그저 그래요. 예전보다는 바쁘구요. 아, 그냥… 인문계 갔어요.

덜컹. 잠시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 잘 지내구. 조금 더 이야기하다가, 딸깍.

갑자기 답답해진다. 가슴 속에, 아니 온 몸 속에 한 가지 문장만이 가득 찬다.

‘내가 만약 그 때 한민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줬다면?’

어쩌면 한민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업계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민이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빨리 찾아서,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이 교과서 속에 들어있는 조그만 세계보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도구들을 만지면서 더 큰 세계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민이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학생들이 미처 펴지 못한 꿈을, 조금 더 쉽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님이다. 아직 미숙한 솜씨로 밑그림만 대강 그려져 있는 학생들의 손에, 다채로운 물감들을 쥐어주고 학생이 빈 캔버스를 아름답게 그려넣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선생님이다. 차가운 겨울 땅 밑에서 겨우겨우 움트기 시작하는 여린 씨앗을 위해, 그 씨앗이 품고 있는 미래의 열매를 위해 손수 호미를 들고 언 땅을 녹여주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으로서 실격이었다.

도리어 나는 한민이에게 배운 것이다. 한민이는 나에게, 선생님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기간이 일주일 늦어졌다. 작년같으면 딱 장마철인데, 이번에는 그건 피했다. 대신, 찌는 듯한 한여름이다.

이번에는 내가 열린교실 지기를 맡다 보니, 국어 모둠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대형 강의실이 학생들 이야기 소리로 가득 울린다. 이제 또 일주일 시작이군. 그 때, 누군가 나를 향해 말을 건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이번엔 아예 모둠 교사도 아닌데, 누가 또 부르는 거지? 돌아보니, 작년에 국어 모둠에서 같이 했던 재훈이다. 약간 마르고, 안경을 쓰던 모습은 그대로인데,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듯 하다. 하긴, 이제 3학년이니까.

언제나 그렇듯 정신없는 입학식을 마치고, 점심은 그냥 국어 모둠에 끼어서 먹기로 했다. 사범대 뜰 안에 앉아서 냉면을 기다리는 동안, 재훈이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고등학교 말인데요… 엄마 아빠가 자꾸 외고 가라고 그래요. 나는 외국어는 별로 자신 없는데… 거기가 좋다고 자꾸 가라고 하시네요.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

그리고, 나는 재훈이에게 되물었다.

“음… 그보다 먼저, 니가 하고 싶은 건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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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인류학 최종보고서 ]

 

아동의 버릇 고치기와 관련된 교육 문화

―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중심으로

 

국어교육과 2001-*****   홍수봉

 

 

 

1. 연구의 배경과 동기

 

2005년 9월 10일,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TV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이하 ‘우리아이’로 씀)>라는 프로그램으로, 당시에는 채원이라는 아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쳐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채원이의 욕을 고치기 위해 가족들이 행하는 교육 방식이, 내 눈에는,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교육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충격에 가까운 폭력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는 “감동받았다”, “정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다”라는 의견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내가 결코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우리아이>의 시청자들은 교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같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까? 대체 시청자들이 <우리아이>를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에서 나는 이 연구를 시작했다.

 

 

2.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

 

나는 처음에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의 잣대로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 교육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가면서, 내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시청자 중에는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원이라는 아이를 보고 거의 즉발적으로 ‘이 애는 이렇게 교육해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육적 반응’ 속에는 ‘교육’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아이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을 교육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생각 없이 대응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성찰을 거치지 않은 채로 어떤 현상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교육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교육관을 고민하기 전에 이미 저마다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니고 있고, 그렇게 체화(體化)되어 있는 교육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교육이라고 여겨진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교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교육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이 반성적 성찰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교육이고 무엇이 교육이 아닌지 말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교육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문화는 성찰 이전에 이미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삶의 양식이자 상식적 신념이다. 문화는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몸의 길’이다. <우리아이>를 보고 난 후의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교육에 대해 고찰하기 이전에 이미 교육이라고 여기고 있는 ‘교육 문화’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이 아니라 ‘교육 문화’ 현상으로 보기로 했다. 나는 이번 연구에서 <우리아이>를 둘러싼 교육 문화 현상 속에 작동하는 문화적 장치와 기제를 탐구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3. 현상에 다가가기

 

1) 현상을 초점화하기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아이>의 소재가 되고 있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을 가공해서 제공하고 있는, <우리아이> 프로그램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아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생각이다.

이 중에서 나는 세 번째 현상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지 작성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우선 시청자가 되어 볼 필요가 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아이>와의 접속으로 인해 생긴 것이므로, 시청자들의 반응이 나온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우리아이>를 보면서 그 프로그램이 어떤 교육적 반응을 어떻게 자극하고 있는지 느껴야 했다. 그래서 <우리아이>를 보면서, 특히 그 중에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교육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에 대해 관찰지를 써 보았다. 단, 나의 교육관이 미리 개입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 1>로 첨부하고 관찰지를 요약해 보겠다. <우리아이>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가족 전체의 생활 패턴 바꾸기, 어린이집에 보내기, 잘못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기 등의 방법이 제안되었다. 가장 강조된 교육 방법은, ‘제대로 된 훈육 하기’였다. <우리아이>에서는 채원이가 욕을 했을 때 전문가 혹은 가족들이 채원이를 훈육하는 과정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훈육의 과정을 매우 ‘교육적’으로 보고 있었다.

 

3)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 읽기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기술지를 쓴 후에,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 들어가서 ‘채원이네편’에 관한 글을 모두 읽었다. 시청자 의견에 올라온 글 중에는 인터넷 문화의 특성상 매우 감정적이고 인신공격적인 글도 많았기에 그런 글은 우선 제외했다.

시청자 의견에는 크게 나누어 <우리아이>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글이 있었고, <우리아이>를 통해 비춰지는 채원이에 대한 글이 있었다. <우리아이> 프로그램에 대한 글은 프로그램의 의도,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교육 문화와 관련성이 적다고 생각하여 제외했다. 그래서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중에서 채원이를 교육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이나 반응이 담겨있는 글을 발췌하여 읽었다. 최종적으로 55개의 글이 지속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다.

 

4)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의 흐름들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단지 다양한 의견이 많이 나와 있다는 양적인 풍부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글에서도 여러 가지 층위의 의견들이 나왔고, 하나의 글 속에도 여러 갈래의 경계선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똑같이 “때려야 한다”는 의견으로 요약하기에는, “때려야 한다”는 언어가 배치되어 있는 맥락이 너무나도 다양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55개의 글들을 몇 번에 걸쳐 읽으면서 글 안에 담겨있는 ‘주제어’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주제어들을 연관성에 따라 몇 갈래의 흐름으로 엉성하게 묶어보았다.

 

① 때려서 교육시켜라. / 선택적으로 때려라. / 때리면 안좋다.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②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하다.

③ 생각하는 의자 안좋다 / 좋다.

④ 아이의 탓이 아니라 환경의 탓이다. / 아이의 타고난 인성 탓이다.

⑤ 친구가 필요하다.

⑥ 채원이 너무 천사같이 변했다. 감동받았다.

 

 

 

4. 흐름의 선택과 질문의 수정

 

위의 목록은 복합적인 글의 흐름들을 최소한의 성긴 그물로 엮어본 것이다. 이런 모든 흐름들을 심층적으로 다루기는 힘들기 때문에, 나는 이 가운데서 하나의 흐름을 선택하여 연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흐름을 선택할 것인가? 처음에 내가 가진 질문은 “시청자들이 왜 <우리아이>에서 교육적 감동을 느끼는가?”였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나는 그 교육적 감동이 폭력적 교육을 지지하는 교육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어 보니, 내 예상과는 다른 현상이 드러났다. 채원이의 변한 모습을 보여준 <우리아이>의 마지막 방송(9월 10일)이 나간 뒤, 시청자 의견에는 주로 흐름 ⑥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아래에 몇몇 예를 든다(강조는 편집자. 앞으로도 분량에 따라 약간의 강조와 편집이 따를 것이다.).

제 목

이쁜채원이..^^

글정보

이 름 박제능(amy9067) 등록일 2005-09-10 19:57:45 조회수 159

내 용

몇 주 전 채원이 처음 볼때는 너무 어린아이가 욕을하기에 놀랬는데

오늘 마지막 방송 보니까 채원이 너무 이쁘고 예의바르게 버릇 잘 고쳐서 기쁘네요~^^

특히 어린이집 캠프날에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 많이할게요. 채원이만세~!" 하는거 너무 귀여웠어요.

채원이 예쁜얼굴만큼 예쁜말만 지금처럼 쭉 했음좋겠어요^.^ 멋진이채원 화이팅 !!

제 목

처음에 채원이를 악마라고 했죠 ....

글정보

이 름 이헌규(steal320) 등록일 2005-09-10 20:00:51 조회수 517

내 용

욕하는 채원이를 보고 게시판에서 악마에 자식이다 가망이없다 등등 말이 나왔었습니다 ... 기억하실겁니다 지금 채원이를 보십시요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

지금 예고편에 아이는 아예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입니다 .... 어쩌면 채원이보다 더 레벨이 높을수도 있다는 생각해보는군요 ....

더 악마같은 아이들이 천사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천사에 아이들이 되길 바라는마음입니다 ^^

제 목

귀여운채원이^-^

글정보

이 름 김형자(papas711) 등록일 2005-09-14 21:14:44 조회수 364

내 용

ㅋㅋ 채원이가 유치원에서 캠프할때 산에올라가서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말할게요 채원이 만세할때 ㅜㅜ 정말 기여웠어요...ㅜㅜ

진짜 막 내 동생이었으면 싶었다 하는 생각도 들엇구요...ㅜㅜ (이아이디는 엄마주민번호로만듬)

ㅜㅜ 흐흐 ㅋㅋ 진짜 채원이 잘생기기도하고 ㅜㅜ 정말 기엽구.. 사랑스럽네요...ㅜㅜ ^-^ ㅎㅎ

진짜 산에올라가서 소리칠때~ 뿅~♡가벼렀다니깐요 ㅜㅜ ㅎㅎ

 

그 전까지의 채원이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방송을 본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내용까지도 무서우리만치 일치하는 반응이었다. 유치원 캠프에 가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즉 시청자들은 이미 ‘천사같은 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채원이의 모습이 그것에 부합할 때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 아이의 내면이나 장기적 변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은 좋은 교육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아이>의 오락 프로그램적 성격, 그리고 ‘결과를 과정보다 중시하는 교육 문화’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처음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석을 내리면서,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처음 질문에는 ‘시청자들이 교육적 감동을 느낀 이유’와 ‘교육의 과정에서 사용된 폭력(체벌)에 대한 인식’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후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앞에 제시한 다양한 흐름 중에서 흐름 ①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특히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반응이 나오는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교육 문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그 교육 문화가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논해 볼 것이다.

 

 

5. 흐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 읽어내기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흐름 ①에 관련된 시청자 의견들을 다시 모아서 읽은 것이다. 그리고 글들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뽑아내었다. 그 자료는 <자료 2>에 첨부하겠다.

그리고 <자료 2>를 다시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주제 문장으로 다시 기술하고, 그것을 범주화해 보았다.

 

범주

주 제 문 장

채원이의 행동은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선,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쁜 행동이다.

* 체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런 심한 행동을 했을 때는 때리는 것도 필요하다.

채원이의 잘못된 행동은 채원이의 나쁜 인성에서 나온다.

나쁜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4살밖에 안된 아이라서 말로는 안통한다. 잘못하면 아프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인간도 동물이다.

군대에서처럼, 좀 맞아야 개념이 생긴다.

* 조선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의 매’가 사용되어 왔다.

이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

지금까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야 버릇이 제대로 든다.

*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어서 거름이 된다.

어릴 때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커서도 못 고친다.

* 나도 어릴 때 잘못하면 많이 맞고 자랐다.

* 어릴 때는 무섭고 싫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때린 것이 존경스럽다.

* 대부분 아이들은 때리면 잘못을 뉘우치고 빈다. 그리고 나서 부모가 때린 후에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 나서도 감동을 받는다.

매를 들지 않으면 어른을 무시한다.

채원이 기가 너무 쎄다. 부모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해야 교육이 된다.

(문장 앞머리에 *표시가 된 것은 나타나는 빈도가 높은 문장이다.)

 

주제 문장들을 읽어보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문화가 지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범주 ㉠을 보면 때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배경이 채원이의 심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을 상식적인 ‘어린 아이’의 행동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느끼며, 결국 일탈적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성있는’ 교육 목표를 지니게 된다.

범주 ㉡은 채원이라는 아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판단을 보여준다. 채원이는 나쁜 인성을 가진 아이이며, 그 인성은 말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채원이의 인성을 고치기 위해서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 즉 폭력이 필요하다. 아픔을 느끼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범주 ㉢은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교육 방법이라면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체벌을 이용한 교육에 관련된 많은 속담들도 체벌의 효용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범주 ㉣과 연결된다. 시청자들은 체벌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나도 맞고 컸다”를 든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맞으면서 컸다. 그리고 어릴 때 맞은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머리 속에서 잊혀지더라도 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시청자들은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교육을 할 때에도 습관적으로 체벌을 재생(再生)하게 된다.

습관적인 재생을 넘어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본 경우에도, 시청자들은 체벌을 좋은 교육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체벌을 통한 교육의 결과(현 시점에서의 자신의 모습)가 좋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오냐오냐 하며 기른 아이가 버릇이 없다”는 간접적인 경험도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체벌 후에 주어지는 사랑은 체벌의 교육적 감동을 더욱 증폭시켜 준다.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이러한 행위는 부모가 자신을 미워해서 체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아이는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부모의 손길에 감동을 받게 되며,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이렇듯 체벌은 ‘사랑’과 결합하여 그 폭력성을 중화시킨다. 그러는 한편, 체벌은 ‘두려움’과도 결합한다. 범주 ㉤을 보면 체벌은 채원이에게 부모의 두려움을 인식시키는 행위이다. 부모와 어른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교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범주를 살펴보면서, 범주에 따라 체벌이 정당화되는 이유와 그 문화적 성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범주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시청자들의 반응 속에는 여러 범주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위의 범주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시청자 의견 하나를 예로 들겠다.

 

제 목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는 좋은 훈육 방법?!

글정보

이 름 김선아(ksa1120) 등록일 2005-09-03 20:38:15 조회수 343

내 용

제가 어렸을 때, 잘못을 해서 어머니나 아버지께 혼날때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의 정도에 따라 회초리를 맞는 수도 달라졌죠.

 

그 혼나는 상황에서는 회초리로 맞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고, 아프니까

무조건 잘 못했다고, 가슴에서는 반성도 하지 않았으면서 입으로는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께요.”를 반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회초리를 맞고 나서 실컷 울고, 설핏 잠이 들라칠 때 부모님은 조용히 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면서 왜 회초리를 맞은 건지. 무엇을 잘 못 했던건지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비로소 제가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가슴 깊이 반성하는 순간이 바로 그 때 였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그 때, 맞아서라도 올바르게 고쳐지고 배운 것이 다행이다. 참 우리 부모님 나를 잘 키워주신 분들이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훈육방법들이 생겨났다고 해도, 예전의 훈육 방법을 미개적인, 옛 것의, 뭘 몰랐던 세대의 훈육방법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되겠지요.

 

물론, 아이에게 신체적인 체벌을 주지 않고서도 아이가 반성하고 고쳐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올바르게 교육시켜야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6. ‘체벌을 통한 교육’의 교육 문화적 과정

 

지금까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오면서, “때려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우리아이>에 한정짓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의 교육 문화적 과정으로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교육 문화의 목표 형성: 교육은 아이의 행동 바로잡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개인의 행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채원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채원이의 ‘욕하는 행동’을 대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를 질문하기 이전에 “어떻게 저런 행동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기에 채원이 정도 되는 아이들의 ‘올바른’ 모습은 착한 말만 하고 어른 말 잘 듣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올바른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일탈이라고 규정짓고 수정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그 아이의 행동을 인정하고 그 행동이 나타난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모습으로 끼워맞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2)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Ⅰ: 군사화된, 폭력에 기반한 교육 문화

특히 채원이와 같이 ‘말로는 안되는 아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말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 ― 즉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점점 ‘개념’이 생기게 된다.

폭력을 이용하여 교육하려는 문화가 형성된 원인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특히 눈에 띄었던 점은, 체벌 문화가 군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단지 남성만이 끌려가서 2년 죽치고 오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어른’의 문화 속에서 군대는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너 군대 갔다와야겠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만약 어른이 어설픈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 군대는 갔다왔니?”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듯 군대는 사람의 행동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정해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군대는 아직까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군사화된 대응 방식 역시 정당화되기 쉽다(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군대에서도 그렇게 하잖아! 군대식으로 해!”라는 말에 대해 마음놓고 비판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의 행동 수정 방법이 교육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3)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Ⅱ: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다.

이것은 체벌을 정당화해주는 또하나의 근거이다. 체벌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 도리어 체벌을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외면적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체벌은 매우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체벌의 단기적 효과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체벌로 인해 형성된 결과가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용인되는 모습일 때,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체벌은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불리게 된다.

 

4) 교육 문화의 전승: 다들 맞으면서 컸다.

이 말은 체벌에 관해 토론을 할 때 가장 할 말이 없어지는 반응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체벌을 통한 교육’이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매우 잘 드러내 준다.

체벌은 이성적으로 합의된 동의 지반에 의해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체벌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서 몸으로, 감정에서 감정으로 전승된다. 마치 군대에서 선임에게 받은 폭력을 후임에게 그대로 돌려주듯이. 체벌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해 재생산된다.

특히 체벌은 ‘사회적 감수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확산된다. 체벌을 미화하는 속담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교육’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에서도 체벌은 ‘좋은 교육’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선생 김봉두>에서 김봉두는 잘못한 아이에게 호된 회초리질을 가한다. 끝내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김봉두는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운다. 그 후 김봉두는 아이와 함께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아이를 달랜다. 이런 ‘사랑의 매’의 이미지가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공되는 상황에서, 체벌을 의식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5) 교육 문화의 두 가지 원형: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

시청자들이 긍정하는 체벌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교육 문화의 두 가지 키워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두려움과 사랑이다.

교육은 두려워야 한다. 교육하는 사람은 교육받는 대상보다 높은 위치에서,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승’의 원형은 회초리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엄한 훈장의 모습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속담까지 있다. 학생이 혹여 선생님께 이치를 따지기라도 하면, 어딜 감히 스승에게 대드냐는 식의 반응이 먼저 나온다. 아니, 심지어 대학 본부를 향한 투쟁에서도 교수‘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서 먼저 ‘예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두려움의 교육은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 강화되었다. 군복을 입고 장검을 찬 채 학생들을 통제하던 식민지형 교사는,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군부 독재와 반공 교육에 의해 교육의 군사화는 더욱 강고해졌다. 결국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교관과 사병의 관계 ― ‘폭력에 의한 두려움’에 기반한 관계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하나만 가지고는 좋은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두려움은 위력이 크지만, 그만큼 반발에도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두려움은 사랑과 결합한다. “나는 지금 너에게 체벌을 가하지만, 그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체벌을 받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저항할 명분마저 잃는다. 아니, 도리어 두려움에 기반한 사랑을 신성시하게 된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이렇게 너를 아프게 할 때, 내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니”라는 식의 희생적인 교육자의 모습.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과 함께 두려움마저도 내면화하게 된다.

 

‘엄부자모(嚴父慈母)’는 전통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원형이었다. 비록 성차별주의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짧은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발딛고 있는 교육 문화 안에서의 교육의 양태를 알 수 있다. 교육은 매양 엄해서만도 안되고, 그렇다고 자비롭기만 해서도 안된다. 사람들은 교육을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런 교육 문화 속에서 ‘사랑의 매’, “때려서라도 교육시켜라”가 가능해진 것이다.

 

 

7.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에 대한 교육적 성찰

 

지금까지 나는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통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교육 목표에 대한 문화도 있었고, 교육의 원형에 대한 문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교육 문화 자체가 정당화되고 전승되는 원리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교육 문화는 말 그대로 교육 문화이다. 그것은 아직 교육적으로 성찰되기 이전의, 삶의 양식일 뿐이다. 물론 이 교육 문화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향이 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영향이 과연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방향인지 아닌지 따져보지 않았다. 교육 문화가 교육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그 영향을 매우 위험한 영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가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1) 내가 생각하는 교육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교육 문화와 교육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교육 문화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교육의 의미는 명제적 형태로 붙박을 수 없다. 교육의 의미는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교육의 의미는 나 ‘혼자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내가 집에서 혼자 교육의 의미에 대해 글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 ― 성장하고 변화해 온 수많은 나들이 만남으로써 생성된 의미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금의 나’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라도 어설프게나마 정리해야 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글은 <자료 3> 으로 첨부하고, 여기서는 <자료 3>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옮겨보겠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 ․ 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이지도 않다?!

 

-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 현실적 맥락 ․ 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2)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

그렇다면 이제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눈으로,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의 속성을 하나하나 성찰해 보겠다.

 

교육 문화의 목표에 대해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의 목표를 ‘행동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교육 목표는 두 가지 면에서 성찰해 볼 수 있다. 첫째, ‘행동’에 대해서. 둘째, ‘올바르게’에 대해서.

 

먼저 행동을 수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육은 기본적으로 변화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분명 행동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의 수정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과 조응하여 움직이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행동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즉 행동을 바꾼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내면에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어 행동이 자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아이의 행동을 대상화하고 체벌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믿는 교육 문화는 매우 비교육적인 것이다.

 

그리고 ‘올바르게’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그 올바름의 기준으로 “천사같은 아이”를 상정하고 있다. 물론 교육의 목표에 교육 주체의 욕망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교육적 욕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대안적 성장의 욕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의 욕망, 권력의 욕망에 포섭되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천사같은 아이”라는 욕망은 과연 올바른가? 물론 욕을 안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며, 예의바른 아이는 분명 올바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아이에게 강요될 때, 그것은 도리어 억압이 된다.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채원이가 왜 욕을 하는지, 채원이의 마음 속에 어떤 갈망이 있어서 욕으로 표현하는지를 무시한 채 채원이에게 ‘착한 아이’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채원이에게 욕은 단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해소를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한 교육에서 벗어나기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 방법의 일환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이용한 교육은 군사화된 한국 사회에 의해 정당화된다.

군사화된 교육은 일차적 의미에서의 체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군사화된 대응 방식은 교육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일진회 사건 때 ‘교육적’ 대응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해병대 캠프 보내기, 스쿨 폴리스 제도 도입 등 통제와 규율 중심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기본적 속성은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맺음이다. 교육은 서로에게 성장을 가져다주고 서로의 가능성을 살려주는, ‘살림’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그러나 폭력은 ‘죽임’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폭력은 어떤 맥락에서 배치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게 된다. 교육이 인정(認定)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폭력은 부정(否定)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듯 교육과 폭력은 그 본질부터가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폭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육 문화에 폭력이 개입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지배와 통제를 위해 교육이 이용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더이상 다른 무엇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교육이 교육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의 교육이 아닌, 과정의 교육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가 좋으면 우선 가시적인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에서처럼, 사람들은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면 그것을 위한 수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긍정해버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목적지를 위해 길을 걸을 수 있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경험하고 느끼며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효율적으로 얻으려면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체벌은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벌은 한번 가해지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했다 할지라도, 체벌은 목적의 달성 여부에 관계없이 아이의 몸에 각인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대로 되살아난다.

물론 체벌의 효과가 빠르고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일 때,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일 때, 그 행동을 빠르게 멈추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 혹은 폭력적 통제가 사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통제라고 이름붙여야 한다. 교육은 인간의 장기적인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기적 목표를 위해 긴 시간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의식적 전승을 의식하기

그러나 체벌의 부정적 측면을 모두 알고 있다 할지라도, 체벌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버린다.

내가 교생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들어서 수업의 반도 못한 채로 종치기 5분 전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나는 꽤 많이 화가 났고, 그래서 순간 교탁을 탕 내리치며 “수업 그만할까?”라고 말해버렸다.

나중에 참 많이 후회를 했지만, 그 당시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했다. 내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나갔다. 물론 나는 체벌을 싫어하고 체벌을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체벌의 동선(動線)과 체벌의 응어리들은 나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전승은 변화의 강력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자동적으로 내 몸에 새겨지니까.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변화이다. 교육은 자각(自覺)과 성찰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 모습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의식적인 변화를 꾀할 수도 있다.

문제는 무의식적 전승이 교육보다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성찰은 힘들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평소에 별로 행해지지 않는, 특별한 활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편하니까. 결국 그것이 잘못된 문화라 할지라도, 무의식적 전승에 의해 우리는 그것을 충실히 재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적 전승은 교육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을 가장 민감하게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가장 그른 것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체벌은 두려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체벌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어찌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지탱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완전한 모순이다.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사랑의 매’ 역시 두려움을 먼저 준 다음에 사랑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해진다. 사랑을 먼저 주고 두려움을 주는 ‘사랑의 매’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 그런 형태의 ‘사랑의 매’는 없다. 두려움이 먼저 제공되고, 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사랑이 제공된다.

그러면 두려움이 먼저 제공된 후에, 어느 시점에서 사랑이 주어지는가? 두려움이 제공된 후에 곧바로 사랑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두려움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된 후에, 즉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반성을 한 후에야 사랑이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의 복종’에 대한 보상적 가치로써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보상은 두려움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즉 두려움과 사랑은 등가적이거나 변증법적인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은유적인 결합이다. 두려움이 원관념이고, 사랑은 보조관념으로써만 기능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랑은 두려움의 본질을 은폐시키고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매’에서 나타난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정치적인 결합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을 ‘사랑의 매’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해보면, 그 결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신체적 폭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교육을 한 적이 있다. 비록 그것은 ‘사랑의 매’의 일환으로 사용된 폭력은 아니었지만, 교육의 속성에서 두려움을 완전히 탈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래에 내가 교육 활동을 하면서 썼던 일지 중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리고 장터를 하면서...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도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긍정해 주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우선은 부드럽게 포용해주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아이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꿈 아이들에게는, 긍정을 넘어선 대결과 자극도 필요하다. 쉽게 포기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관리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책임감이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몰아칠 줄도 알게 되었다. 강하게 대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조금은 느끼게 되었다. 온냉(溫冷)을 조절하는 방법도, 조금은, 조금은 깨달았다.

 

대안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활용했다. 아이들이 동기를 가지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성의 없이 “안해요”라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었다. 장터에서 홍보 전단지를 부끄러워서 못 돌리겠다고 빼는 아이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면서 경험해보게 하였다.

내가 그렇게 두려움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이들과 충분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도 나의 그런 행동을 단지 두려움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에 기반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해서, 차악(次惡)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들의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우는 현실의 교육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충분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은 ‘사랑에 은폐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과 다르다.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폭력이 아니라 압력(壓力)의 맥락에서 활용되는 두려움이다.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게 만드는 압력, 홀로 서게 만드는 압력, 나태해지려는 아이를 추스리게 만드는 압력. 그것은 성장을 저해하는 폭력이 아니라, 성장을 자극하는 교육적인 압력이다. 마치 어미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단련시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것처럼. 그런 압력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한적으로 두려움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압력으로써의 두려움 역시, 최소화되어야 한다. 두려움의 교육을 활용하되, 그것을 정말 계획적이고 의식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도리어 사랑의 교육을 행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이들이 나의 두려움의 교육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느 순간 두려움이 교육을 넘어서고 있지는 않은지, 민감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8.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교육 문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며, 교육은 그 교육 문화를 성찰한 결과 만들어진 ‘관점’이다. 그러므로 교육 문화가 교육의 원천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교육 문화가 교육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교육 문화가 교육으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진지한 성찰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교육 문화가 진정 사람을 성장시키는 길인가, 혹은 아닌가. 그런 성찰을 통해 교육은 교육 문화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모순이다. 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에게, 네가 마시고 있는 물이 좋은 물인지 안 좋은 물인지 묻고 있는 것이니. 기존의 물을 마시고 살아온 물고기가 기존의 물 자체를 성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다른’ 물, ‘새로운’ 물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기존에 마시고 있는 물이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물인지, 아니면 오염된 물인지, 오염되었다면 어디가 오염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성찰을 통해 형성된 교육은 다시 교육 문화를 바꾸게 된다. 결국 문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교육을 상상하고, 그 교육적 상상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그만큼 더 다양한 교육 문화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교육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범벅이 되면서, 더 나은 교육적 삶도 가능해진다.

시청자 의견 중에서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라는 글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답답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의 틈새를 발견하였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한다면, 더 나은 교육을 제시한다면, 오랫동안 굳어온 교육 문화도 바뀔 수 있다. 결국 문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9. 연구에 대한 연구(硏究)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는 ‘연구’가 나 자신에 대한 기술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내내,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동시에 돌아보아야 했다. 어느 순간 생각이 가는 대로 저만치 나아가다가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내가 나아갔던 발자취를 꼼꼼히 점검해 보는 것. 마치 달팽이가 온 몸을 쭉 폈다가 다시 움츠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듯, 나의 연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특히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를 쓸 때, 나는 내 생각을 쓰고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려놓은 ‘나’를 다시 객관화해서 보면서, ‘나’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보고서를 쓰면서 용어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현상, 기술, 분석, 해석, 문화 주제, ……. 질적 연구를 둘러싼 많은 용어들은 하나하나에 대해 논문 하나씩 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연구 속에서 그 용어들을 ‘내 방식대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정의내리지도 못한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결국, 나는 일상 용어를 빌려서 내 언어를 만들어 썼다. 최대한 적합한 단어를 찾으려고 사전도 뒤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표현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이것으로 완결이지만,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교육은 행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과정이니까.

< 자료 1 ―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채원이네)’ 관찰지 >

① ‘채원이가 욕을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채원이와 놀아주지 못하고 채원이가 언제나 놀이터에서 놀면서 어른들에게 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문가는 ‘도덕 관념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주 어릴 때는 야단맞으면 나쁜 것으로, 야단맞지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즉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전문가는 처음에 채원이의 욕 보다는, 채원이의 생활 전반에 대해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규칙적 생활 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채원이가 자신에게 맞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도록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채원이와 좀 더 놀아주라, 채원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라는 등의 제안이 바로 그것이다.

 

③ 채원이에게 ‘걸맞는’ 놀이감을 사 주러 갔다. 놀이는 단지 노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감정과 사고가 발달한다는 전문가의 말. 특히 놀이를 통해 공격적 마음을 표현하게 해 줄 수 있다.

 

④ 채원이에 대한 훈육 방법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눈을 맞추고, 내용은 엄하게, 간결하게”라는 전문가의 멘트. 채원이 엄마가 채원이를 훈육할 때, 우선 구석에 데려가서 “엄마 봐. 그러지 마. 뚝.”와 같은 식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프로그램에서 “팔을 잡고 / 눈을 맞추고”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훈육 후에 따뜻한 위로를”이라는 멘트와 함께 엄마가 채원이를 달래준다. 훈육 내내 채원이는 울면서 엄마의 시선을 피한다.

 

⑤ 아버지와 채원이의 정서적․신체적 상호작용을 격려한다.

 

⑥ 채원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한다. 마치 옛 어른들이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에게 회초리를 스스로 가져오게 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또 아이가 자신이 왜 야단맞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즉 훈육이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부모 역시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⑦ 전문가가 채원이의 스티커를 가지고 있자, “만지지 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채원이는 침대에 누워서 스티커를 가지고 뒹군다. 엄마가 와서 “채원이 일어나서 해. 일어나서 안할거야? 안할거면 엄마 줘.”라고 말한다. 채원이는 스티커를 껴안고 있다가, “안할거야.”라면서 던진다. 그리고 엄마는 “제자리에 갖다 놔.”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채원이가 말을 듣지 않자 스티커를 뺏어서 가져간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부짖는다. 엄마가 와서 “뚝! 또 악쓴다, 뚝!”하니까 채원이는 울면서 “버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채원이가 스티커를 제자리에 갖다놓지 않았다고 야단을 친다. “또 이러면 엄마 이거 버려버린다~! 알았어? 대답해.” 그러자 채원이는 엄마를 외면하고 침대에서 돌아앉는다. “엄마 안봐?! 알았어. 나도 너 안봐.”하고 엄마가 가버리자, 채원이는 조금 앉아 있다가 엄마를 흘겨보며 욕을 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훈육이 시작된다. 전문가가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채원이의 팔을 잡자, 채원이는 “놔~. 아프단 말이야!”라고 소리친다. 채원이는 전문가에게 욕을 하고, 전문가는 “욕 하면 안돼.”라고 말하며 채원이와 대결하고, 채원이는 울어버린다. 채원이는 울면서 전문가에게 계속 욕을 하고, 전문가는 채원이의 팔을 꼭 잡고 “어떻게 하면 놔준다 그랬지?”라고 계속 말한다. 그리고 “선생님과 채원이의 힘겨루기”라는 자막이 뜬다. 채원이의 욕은 계속되고, 전문가 역시 팔을 잡은 채로 “뚝! 어허~그만! 뚝!”을 반복한다. 여기서 “일관된 선생님의 태도”라는 자막이 나온다. 채원이가 계속 울부짖으며 욕하고, 선생님은 계속 “그만”만 말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진다. “욕해도, 안 통해.”라고 말하는 전문가. 결국 채원이는 울기에 지쳐서 안달하다가 점점 울음을 그친다. “점차 누그러지는 채원”이라는 자막이 나오지만, 채원이의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있는 듯 하다(그림 1). 채원이의 울음이 잦아들자 엄마가 채원이 앞에 앉아서 “잘못했어 안했어.”라고 다그치고, 채원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훈계를 좀 더 하다가 안아준다. 잔잔한 배경음악 흐른다.

 

⑧ 채원이가 욕 했을 때의 할머니의 약한 대응에 대해, “할머니, 따끔하게 혼 내신 거 맞나요?”라는 멘트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문가의 훈육 방법. 훈육할 때는 그 즉시, 정면으로 눈을 맞추고, “부드럽지만 부모로서의 위엄을 가진 눈빛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 후 아이에게 그 행동이 명확히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알려주어야 한다.

 

⑨ 채원이가 모래를 뿌리자, 할머니가 채원이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큰 소리로 나무라면서 엉덩이에 체벌을 가한다. 채원이는 할머니를 외면하며 딴청을 피운다. 할머니가 계속 체벌하면서 “또 그렇게 할거야!”라고 크게 나무라자, 채원이는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요”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채원이. 그리고 “채원, 비로소 잘못을 깨달은 듯”이라는 자막이 나간다. 할머니는 꾸중을 마치면서 채원이를 안아준다. 그러나 채원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채원이가 할머니의 심정을 알아줄까요?”라는 멘트가 나간다.

 

⑩ 채원이가 잘못하고 엄마가 “어떻게 할까?!”라고 하자, 채원이는 “의자에 앉히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는 “채원이 가서 앉어. 채원이 뭐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앉아 있어.”라고 말한다. 결국 채원이는 울면서 의자에 앉혀지고, 앉자 마자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손 가만히!” “채원이 반성할 때까지 엄마가 얘기 안할거야.”라고 말하며 채원이를 훈육한다. 다른 가족들도 냉담하다. 엄마는 엄격하게 훈육을 마친 다음, 채원이를 안아준다.

 

⑪ 채원이가 이번에는 엄마에게 직접 욕을 했다. 엄마는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못했어 잘했어.”라고 다그친다. 채원이는 울먹이며 곧바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잘못했으면, 반성해. 반성 다 하구, 나중에 엄마 불러.”라고 말하고는 채원이를 의자에 앉혀두고 가버린다. 채원이는 “엄마 잘못했습니다~”라고 크게 울지만, 가족들은 하나같이 냉담하다. 채원이가 일어서자 엄마는 다시 와서 채원이를 앉으라고 꾸중하고 간다. 채원이는 할머니에 이어 아빠까지 찾아보지만, 가족들은 “아빠 왜 찾어 원이가 잘못했는데”와 같이 계속 단호하고 무뚝뚝하게 꾸짖는다. 채원이는 분위기에 질린 듯 계속 울부짖는다. 아빠가 나와서 채원이를 다시 앉게 하고는, 채원이의 잘못을 묻는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먹이면서 잘못한 것을 말한다. 채원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마지막에 엄마가 다가와서 좀 부드럽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한 뒤에 안아준다. 할머니들도 차례로 채원이를 안아주고,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채원이의 욕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 자료 2 ― 흐름 ①의 글 중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 부분만 발췌한 자료 >

무조건 두들겨 패야 됩니다.. 매 밖에 없어요..

욕하면 나쁘다는것을,, 함부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뼈속깊이 기억하게 하고싶네요.

어느정도 매를 때려서 그 아이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야죠.

때린다고 모든게 다 해결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선에서죠.

엄한 부모밑에 효자 있는 법입니다. 오냐오냐 키운 자식이 겨오르는 법입니다. 떼쓰는애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니까 밥만 잘먹습디다.

갈구세요.. 구타도 좀하고.. 애가 개념이없잖아요.. 군대갔다왓죠? 그대로 하세요.. 좀 맞다보면 개념이 생기거든요.. 우리집개도 잘못햇을때 때리면 다신안그러거든요..

조선시대때 애가르키는거 보면 패는것도 싱거운거 입니다

그 놈도 오냐오냐 한대도 안맞고 자란 놈... 어른이 다 된 지금 보고 있노라면 아주 개싸가집니다. (중략) 하여간 그 자식도 앞날이 참 걱정됨. 그런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한 체벌도 하세요!!!! 엉덩이 몇 번때린다고 애 안죽습니다=_=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

애는 맞고 자라는 것 입니다. 인간도 동물이구요.

정말 존경스럽다....예전엔 글케 무섭고 싫었었는데.... 자식농산 진짜 바로앞을보고 하는게아니라 10여년 뒤를 보고 아니 20여년뒤를보고 해야한다는걸..

그런애들은 따끔히 혼내야 한다. 나도 4살때 때 엄청쓰다가. 아빠한테 엄청 큰매로 맞았다. 그후로 난 때써본적이 없다. 나는 그 기억이 뚜렷하다. 채원이한테 매를 드는게 좋을듯. 말로만 말고. 욕을할려고 하면 맞은기억을 절때 잊지 못한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따끔하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가르쳐줘야 해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줘야 한다는 겁니다.

분명 할머니가 혼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여 그러는 것이니 앞으로 할머니도 매를 드셔야 합니다.

이쁜 자식 매한대 더 때린다고... 잘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야단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심한말을 했을땐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세우는것도 괜찮은 방법같은데 너무 방관하시는게 아닌가 싶어요.

타고난 인성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문제는 티비로 본 그애의 타고난인성에 걱정이 될뿐이다

기가너무 쎄서 기를조금 조절해야해요. 결론은 좀맞아야 될것같네요,,

(중략) 채원이 부모에게 고합니다. 당장 매를드세요 패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패라는 말이아니라 싸리나무 회초리를 100개만준비하시고 채원이가 욕하고 다른아이에게 해코지 할때마다 종아리를 피가나도록치세요 그래도 안고쳐지면 회초리를 점점굵은것으로 바꾸어주시고요 옛날 우리조상님의 지혜로운 교육법을 실천하세요 그러면 채원이는 착하고 이뿐아이로 자랄수 있습니다

어른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오냐 오냐 하시지 마시고 사랑의 매를 가져다 손바닥 또는 종아리 욕하면 3대 한번 더하면 4대 이런식으로 단호하고 따끔하게 사랑의 매를 대세요. 마음 아프실지 모르지만 지금이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학교에라도 가게 되면 고치기 더 힘듭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과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 애정을 쏟으셔야합니다. 하지만 잘못된행동과 막무가내 떼쓰기를 할때는 지금보이는 정도의 꾸중으로는 개선되지않습니다.

참..-_- 보는 내내 회초리 생각 밖에 안났습니다 조용히 엄마가 방에 데려가 아이의 잘못을 말한 후 엄하게 10대만 치고 아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악을 쓸것이 아닙니까? 채원이 같은경우는 안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하다고 손으로 빌면서 무릎꿇고 빕니다.

그러고 나서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나서의 그 감동이란!!! - -! (중략) 저는 잘못했을때 맞고 컸는데 ㅠ

그냥 욕한번하면 때리는게 최고입니다 무슨 별 요상한 방법 다써도 때리는거보다 좋은거 없습니다 욕한번할때마다 한대씩 때리다가 안고쳐지면 2대 3대 때려요 때려 다 맞으면서 컸구만

저도 아빠가 하도 무섭게 상식밖으로 때려서 저도 아빠에 대한 기억은 맞은 기억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님이 오늘 채원이 나온거 보셨다면 그 생각이 달라지실겁니다. 채원이같은 애는 타이른다고 되는거 아니거든요. 차라리 종아리든 엉덩이든 때리는 훈육이 필요해요.

(중략) 매를 안들어서 우습게 보고 영악해지는거거든요. 매를 안들고는 누구도 고칠수가 없어요. 다만.. 자주 때리면 님 글 내용처럼 무서워하니까 적당한 체벌은 있어야 합니다. 글구 자식이 부모를 무서워해야죠.

암튼 그래서 어느날 또 그러길래 제가 방에 가둬 놓고 진짜 막 때려줬어요 그러면 더 역효과 난다고 애들은 절대 때리면 안된다지만 전 솔직히 그때 참다 참다 정말 많이 때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 되었단건 아니지만 그후로 우리 아이 욕 절대 안합니다 아이가 왜 맞는지.그리고 욕을 왜 하면 안되는지.. 솔직히 채원이 정도의 아이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꺼 같아요.ㅡㅡ

체벌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었을때 거름이 되지 않나 싶네요....

솔직히 좀 맞으면서 큰다고해서 그게 아이에게 어떠한 정신적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청 맞으면서 컸잖아요? 개인적으론 그게 저에게 성장과정에서 나쁜영향을 준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가끔 제게 너무 나쁜 습관이 발견되거나 할때, 우리 엄마 아빠.. 그때 나를 방에 가둬놓고 마구마구 패서라도 공부 좀 독하게 시키고 이런 버릇은 좀 고쳐주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던데..-_-a 필요할땐 채원이도 좀 맞아야해요.

두려움이 없는 아이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략) 죽지않을 정도로 패시기 바랍니다. 말로 안될때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태를 알게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의 위협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 아이는 조금 마음이 움직일 정도의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과 교육으로 가르치십시요. 그 아이가 세상에 두려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교육이 될 것입니다.

제가 봤을때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답한것 같아요.. (중략) 이경우엔 적절한 ...사랑의 매 필요하다 봅니다...

최선책은 회초리라고 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식을 키웠던 방식이 바로 회초리 아닙니까? 아무리 채원이에게 하지마라 하지마라 해도 4살밖에 안된 아이가 말 한마디에 고쳐지겠습니까? 정 안되면 정말 회초리를 드십시요.

채원이를 보면 어른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있어보이는데, 회초리로 어른의 위엄을 보여주세요. 채원이가 할머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정말 보면서 화가나더군요. 할머니께서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려야 될듯 싶지 않나 생각합니다. (중략)

제가 커서 자식을 낳았을때 채원이의 경우라면, 전 욕하면 하는대로 입을 때려줄 겁니다. 나쁜 욕 내 뱉는 입은 쓸모없는 입이라며 입을 때려주고, 엄하게 다스려도 안되면 회초리를 들겠습니다.

약간의 매는아이에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렸을쩍 심하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엄마께서 일정한 장소로 데려가 지정된 회초리를 가져 오라고 하시구 몇대 맞아야지 괜찮을껏 같냐구 물어보십니다. 왜 잘못을 해서 맞아야 하는지도 물어보시구요. 그방법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때부터 엄마 말은 정말 잘들었구요 커서도 엄마말은 거역한 적이 한번두 없습니다..

아버지의 체벌을 엄마보다 좀더 두려운 상대여서 저도 한번 아버지가 화내시면 무서운 존재라는걸 알기에 아버지가 싫어하실만한 나쁜짓은 절대로 안합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체벌한적은 어렷을떄 딱 한번 밖에 없는데 어렷을쩍 충격이 아직까지도 가는것 같네여;; ㅎ

그만큼 적당한 체벌은 아이들 에게 좋다고 느껴집니다

그건 부모가 자제력을 잃고 폭력을 쓰는게 아니라 아이가 어려서 말로 설명만 해가지고서는 의사소통이 안되니까 그나이에 옳고 그름을 분간할수있게 알려주는 한가지 수단입니다.

우리가 어릴때 불에 손을 데고나면 불이 뜨겁고 위험한 것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처럼..욕을했을때 아픔을 느껴서 아..욕하면 아프구나 하지말아야지를 스스로 알수있다면 나쁘 버릇이 고처지겠지요. 그런식으로 고치면 뭐하냐고 하는분이 계신다면..우리도 어릴때 불은 뜨거운거야 라고 듣기만 했을때 그걸 알았습니까? 그 나이에는 정말 데어봐야 알수있는겁니다. 아직 그 수준인 거지요. 그 다음에 머리로 (데는 경험을 한적이 없더라도) 불이 위험하다는걸 감지할수있는나이가 지금 채원이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자기가 쓰는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말인지... 그러한 행동들을 고쳐주는건데 뭐가 나쁩니까??

< 자료 3 ― 내가 생각하는 교육 (2005년 12월 12일 수정) >

 

“너는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에 대해 명제적으로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워낙 추상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활용되기 때문에, “교육이란 이런거야!”라고 먼저 외연을 긋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꾸로, 제가 지금까지 (짧은 삶이지만) 살아오면서 느꼈던 ‘교육’, 혹은 ‘교육 아닌 것’들을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해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지, 변죽이라도 한번 울려볼까 합니다.

 

 

1. 내가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

 

저는 대학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학년 때까지 저는 엄청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김진명씨 소설에 감격해 마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무언가 엄청난 사명감을 느끼는, 국민교육헌장을 매우 잘 훈육받아온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1학년 가을, 한 좌파(?;) 선본에서 선거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파 선본을 하면서도 꿋꿋이 민족주의 선본을 찍을만큼, 당시에는 신념이 확고했지요^^;

그런데 한 선배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베트남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국의 침략 지원 전쟁, 그것도 돈과 권력을 위한. 만약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냐는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광인 일본놈들 따위야 천벌 받아도 싸다고 생각하던 제가 처음으로 ‘내가 평범한 일본인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공산당 선언」을 읽고, 겨울에 철거촌 현장활동을 가면서 저는 책에서 읽은 모순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의 혁명적 전환’이었지요.

저는 이것이 저에게 가장 깊은 교육적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 그리고 현실과 맞닿아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 그 두 가지 원리가 결합될 때, 가장 큰 교육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갑자기 웬 식상한 얘기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의 가치관과 정서의 50%는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저에게 ‘감동’을 준 책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저에게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계 안에서 또한 체험하고, 느끼고, 교육받습니다.

물론 책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는 것은, 제가 구성하고 있는 세계와 책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의 만남입니다. 그 접점에서, 저와 책이 소통할 때, 저는 성장하고 교육받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제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혹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책 속에서 만날 때, 저는 책이 제 안에 흡수되고, 저 또한 그만큼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세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험은, 세미나입니다. 문학 세미나, 교육 세미나, 사회과학 세미나 등 대학에서 참 많은 세미나와 토론을 겪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경험이 교육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토론의 경험들이 저의 생각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특히 문학 세미나는 단지 쟁점과 이론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경험을 공감(共感)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앞에서 든 경험 외에도 무수한 교육적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 얘기하다가는 글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또 그 경험들은 대부분 위의 세 경험과 비슷하게 묶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내가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저는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보다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이 더 많습니다. 비평준화 사립 지방 남자 고등학교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입시․폭력․훈육의 화려한 앙상블이 자행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저런 선생님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사범대에 지원했으니까요.

그 중에서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특히 이 경험은 저도 처음에는 교육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교육이 아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라 저에게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읽으셨겠죠?^^;(안읽으셨다고 지금 읽지는 마세요. 그닥 좋지 않은, 위험한 책입니다-_-) 거기서 새로 부임한 교사가 엄석대의 전횡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대를 체벌하고, 학생들도 다같이 맞는 장면이 나오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책으로 읽었을 때는, 정말 좋은 교육이다, 멋진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열린교실 학생들에게 수업 자료로 사용하면서, 비디오로 다시 한번 보았지요. 그런데 같은 장면이, 비디오에서 시청각적 이미지로 재생되니까 갑자기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더라구요. 제가 깨닫지 못하는 어떤 공포의 기억을, 제 몸은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그게 중학교 1학년 때 단체 기합 받으면서 맞았던 기억이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교육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육에서 필요악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악은 악을 이용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이루겠다는 것인데, 교육은 그 과정에서 악을 이용하는 순간 이미 교육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 때문에 제 연구 주제가 훈육과 체벌에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교육인지 아닌지 스스로 모호했던 것

 

마지막으로 이것을 교육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말 고민되었던, 난감했던 상황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독서 지도 과외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책에 너무 흥미가 없어서 결국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으로 시작했는데, 아이는 그 만화 속에서 폭력과 전쟁의 매력을 발견하더군요-_-;; 오래 토론했지만, 결국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내용은 우선 빼고 과정만 놓고 본다면, 제가 앞에서 교육이라고 주장한 ‘책읽기’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장의 방향성을 떠나, 아이 또한 교육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판단하기에 그릇된 방향으로의 변화이므로, 그것은 교육이 아닌 것일까요?

 

 

4.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속성

 

앞에서 쓴 제 경험을 다시 읽어보고, 제가 생각하는 교육의 성격을 간단히 적어보았습니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책읽기가 대표적인 예이며,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 혼자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교육이 일어나기도 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첨언하겠습니다. 특히 비폭력주의나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같은 경우, 단지 사상의 변화로는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도리어 신체의 변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신체, 감수성, 민감해지기, 공감하고 유대하기 등이 교육의 구체적인 요소들입니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교육은 이런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이 방향이 아니면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도 않다?!

 

 

 

 

글을 쓰고 나니 한편 정리되면서도, 또한편 헷갈리는군요. 특히 여기서 제가 ‘교육’의 외연을 정확하게 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교육의 외연을 정확히 그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예를 들어 치료―교육―사회적 개혁은 분명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변화를 모색할 때, 우리는 이 세 영역을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의 외연에 얽매여서 현실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되겠지요(실제로 교육자라는 사람들이, ‘이건 사회적 문제니까 나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결국,

다시 누군가 저에게 “교육이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덧붙이는 단상>

 

교육은 교육의 결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으로써 규정된다.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

 

현실적 맥락․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그 과정 전반에 ‘기존의 나’와 ‘변화한 나’ 사이의 긴장이 일어난다. 그 긴장 사이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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