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일은 잊혀질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드십시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도와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입니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십시오.

우리는 줌으로써 얻기 때문입니다.

                                                                                           

(나의 덧붙임)

당신이 관심을 가지면
그들은 무시하고 공격할 것입니다.

당신이 믿음을 주면
그들은 배신으로 갚을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면
그들은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주면
그들은 당신을 결박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당신이 연민으로 흐느끼면
그들은 냉소로 비웃을 것입니다.

당신이 참고 기다리면
그들은 당신이 졌다고, 의기양양해할 것입니다.

당신이 용서하려 하면
그들은 당신에게 올가미를 씌울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의 앞에서 진실을 속삭이면
그들은 당신의 뒤에서 거짓을 소문낼 것입니다.

당신이 노래하고 이야기하면
그들은 당신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을 것입니다.

당신이 어여쁜 이들을 돌보면
그들은 당신에게서 어여쁜 이들을 앗아가려 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려 하면
그들은 당신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왜곡하고
당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가려 하면
그들은 당신까지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만은
사랑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그들은 생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살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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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2009. 12. 8. 19:30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생명문화학 전공

http://songeui1.catholic.ac.kr/gslife/index.asp

서울대 교육학과 교육인류학 전공

한국교원대학교 (아직 끌리는 전공은 없음. 교육과정?;)
http://www.knue.ac.kr/new_knue/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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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에서 이어짐

어제 조용환 선생님의 논문을 읽다가 문(文)과 질(質)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문은 무늬이며, 질은 본바탕이다.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질이 먼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문이 표출된다.
그러나 요즘은 문(文)이 질(質)을 왜곡하고, 문이 질을 망가뜨린다. 비단 영화나 대중문화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자신, 특히 청소년/청년들은 망가진 대중문화를 먹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질은 없고 문만이 떠다니는 텅 빈 우리들이 살아지고 있다.



그래서,
왜곡된 文의 덧칠을 씻어내고
質로 되돌아가서
망가진 質을 되살리고
質에 어울리는 文을 길어올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회복이며,
'살림'이고
'사랑'이며
'자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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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choolinfo.go.kr/

그러나,
여기에 공개되는 정보들이
정녕 '교육'의 본질에 관한 정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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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출퇴근

2009. 11. 27. 20:14

수도권 자전거지도 다운받는 곳

근데 정말 적다...ㅜㅠ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돌아가야 해.ㅜㅠ

근데 거리는 25km 정도밖에 안 되네?^^;


관련 누리집
서울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자출사 까페


삼천리자전거보문대리점
02-926-3838 서울 성북구 보문동4가 87

코렉스자전거 로드뷰
02-891-2343 서울 금천구 시흥동 814-21

금천엠티비 로드뷰
02-806-9338 서울 금천구 독산동 1055-11

삼천리자전거 시흥3동점
서울 금천구 시흥3동
940-11호
http://www.samchuly.co.kr/mini_home/mini_intro.htm

:

다만, 공립학교 선생님이 되려면 임용고시를 치게 되는데 이 시험에 통과해야만 합니다.

[출처] 사범대 순위|작성자 미니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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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hnews.net/bbs/list.html?table=bbs_10&idxno=32

 2008-12-12 19:17:24   조회: 731  
+. 평화 속에 글을 올립니다.
우리나라 교육 안에서 대안교육의 자리가 점점 확대되어감을 모두 아실거에요.

인가된 특성화 대안학교, 미인가 대안학교 모두 살아 있는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교육계의 현실은 어떠한지요......


1. 지금의 공교육 현실

해마다 학교 부적응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이 2-3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교육부에서 발표하지만 많이 축소된 듯)
그리고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교육부, 각 신문에 자주 올라옴

2. 대안학교 현황(대략적)

'대안교육연대' 등의 자료를 보면 대부분이 개신교 학교들로서 그들의 신앙 바탕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한편, 원불교에서는 인가된 대안학교에 집중 투자하면서 인가된 대안학교(특성화학교)를 8개 운영합니다. 이를 통해 해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입학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 대안교육연대, 대안학교협의회 등 참조

3. 가톨릭 신앙에서의 대안학교는?
인가된 곳으로는 청주교구 양업고등학교 딱 하나.
미인가로서 서울 고척동 성당에 있는 초등대안학교(참 좋은 기초학교), 예수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하늘 씨앗살이) 등이 있습니다.(직업센터 등은 제외함-노동부 관할임)
=======>가톨릭 대안학교들 연대,교류 없음

4. 앞으로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필요한 학교들은?

1) 가톨릭 정신과 문화가 살아 있는 학교가 필요합니다.

2) 학교부적응 학생을 위한 인가된 특성화학교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양업학교같은 학교 부적응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지금은 일반적인 아이들로 가득하답니다)

3)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특성화학교도 필요합니다.(실례로 북에서 넘어오는 새터민 청소년들의 사회 적응형 학교-ngo에 의하면 동남아에 35만의 새터민들이 있다합니다. 이들이 일반학교로 보내지기 전 어느 정도 기간의 적응 교육 기간을 주는 학교)(아울러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4) 보다 다양한 교육이 가능한 미인가 자유학교들도 필요합니다.

5) 가톨릭 정신이 살아 있게 하기 위한 가톨릭 대안학교들의 연계 활동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에 가톨릭 언론사에 제언합니다.
1. 우리나라 종교계의 대안학교 현황과 현주소를 취재하고,
2. 가톨릭 대안학교의 모습을 취재했으면 좋겠습니다.
3. 아울러 앞으로 가톨릭계 대안학교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획기사가 실린다면 많은 분들이 호응하실 겁니다.


아마도 이 기획기사가 실린다면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분들이 자녀 교육 문제에 커다란 관심과 걱정이 있기에 진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기사가 될 것입니다.
(양업고등학교 경우 신입생 전형 때가 되면 수많은 신자 부모님들이 몰려듭니다. 경쟁률도 대단하고, 그 갈증을 과연 누가 풀어주어야 하는가요....)

교육은 미래를 책임지는 신앙적, 문화적 바탕이 됩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번 기회에 꼭 알짜배기 교육 기사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변경환 베드로 올림.(korpeter@hanmail.net)
- 한때 수도자였고,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지금도 선생으로 살고 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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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2009. 11. 21. 20:05

알아보긴 했는데,
아직 마음에 들진 않아요...

저와 루샤에게 주신 물질적 기반이
저희의 건강과 보험을 위해 쓰라고 주신 건 아닌 듯해서요...>_<


알아보니 좀 다양하게 알 수 있는 데가 있더군요.
밑에 주소 들어가면 비교되어 있어요.
http://www.insvil.kr/loan/home/insvil/home.php?go=page&num=4822

한번 들어가 보세요~^^

:
오늘 문득 생각난 벌

말로 하다하다 정 안 될 경우,

1. 학기 초에 학급도서 예상 목록을 공개한다.
2. 아이들에게 벌 공지한다.
3. 벌 받을 학생 생기면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오라고 한다.
4. 점심시간에 같이 서점으로 간다.
(서점에 없는 책이면 그 아이 아이디로 인터넷 주문한다. 혹은 내 아이디로 하고 돈 받는다. 영수증 써준다.)
5. 도서목록의 책을 산다.
6. 책에 "누가, 언제, 어떤 마음으로" 책을 샀는지 적는다. 교사 싸인도 한다. 만약 많이 심해지면 애보고 반성문 쓰라 한 다음 책에 붙여 버린다.
7. 학년 내내 돌려가며 읽는다. 도서 대출 카드도 만들어서, 누가 언제 왜 읽었는지 적는다.
8. 책 읽고 독서 감상 후기를 편지(혹은 쪽지)로 책에 끼워서 주게 한다.
9. 학년 끝나고 책 돌려준다.


난 아무래도 천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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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있다.

2009. 11. 1. 15:17
최근 방영된 드라마 <스타일>에서 김혜수가 자주 써서 유행이 된 말이 있다.



"엣지 있게 해."

엣지 있다. 신조어같은데,
드라마 안에서 쓰이는 걸 살펴보면
'스타일 있게, 뽀대 나게, 간지 나게' 뭐 이런 말과 유의어 같다.
아마도 다림질 잘 된 옷의 다림질선, 그 날 선 가장자리를 '엣지'라고 말한 듯하다.


그럼 원래 Edge란 무슨 의미일까?
한컴 사전을 찾아 보았다.

edge [edʒ] n.
① 끝머리, 테두리, 가장자리, 변두리, 모서리; (비유) (나라·시대의) 경계; 위기, 위험한 경지; 〖컴퓨터〗 모서리.
② (칼 따위의) 날; (비평 따위의) 날카로움, 격렬함.
우세, 강점.
④ (미국속어) 거나하게 취함.

edge [edʒ] v.
―vt. ① 『+목+보』 (칼 따위에) 날을 세우다, 예리하게 하다.
② 『∼ +목/ +목+전+명』 테를 달다, 테두리를 두르다, 가장자리를 매만지다(with).
③ 『+목+전+명/ +목+부』 비스듬히[천천히] 움직이다, 조금씩 나아가다[움직이다](away; into; in; out; off; nearer).
④ 【미국】 ┅에 근소한 차로 이기다.
―vi. 『+전+명』 비스듬히 나아가다; 옆으로 나아가다; 천천히[조금씩] 움직이다.


edge는 가장자리이다. 변두리이다.
그래서 관심이 잘 안가는 곳이고, 위험한 곳이다.
그렇지만 또한 우세한 곳이다.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된다.

사회는 언제나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다. 사회의 권력은 사회 속에서 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모으고, 약한 자들을 주변으로 내쫓는다. 그래서 주변부는 약하고, 위험해진다(안전은 언제나 권력 아래에서만 보호받는다).

또한 중심부에는 사회의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주변부에는 그렇지 않다. 마치 중력이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지듯이. 그래서 주변부에는 권력에서 탈출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문제는, 사회를 폐쇄적으로 보지 않고 개방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이 과연 진정한 '강점'인가 하는 점이다.
사회가 홀로 있고 폐쇄되어 있다면, 그 사회 안에서만 살아가야 한다면, 주변부는 단지 위험한 공간일 뿐이다. 거기서 탈출한다 해도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면 결과는 죽음 뿐이다.
그러나
만약 바깥에 '다른 사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탈출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주변부는 중력이 약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드나듦이 자유롭고, 그만큼 다른 사회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그래서 만약 기존 사회가 모순을 안고 있고 붕괴될 위험에 처할 때, 주변부의 사람들이 도리어 우세해진다.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고, 탈출도 그만큼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급격하지만은 않다. edge는 비스듬히 움직이며, 조금씩 나아간다. 사회는 견고한 성이 아니다. 사회는 무른 유동체이다. 가장자리, 변두리에서부터 시작한 변화의 움직임이, 비스듬히, 조금씩 확산되어 결국 중심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진정으로 edge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옷과 외양을 꾸미는 데 주력하지 마라.

그저 꾸밈에 불과한 옷깃 따위를 다림질해서 edge를 내기보다,
자신의 정신과 존재에 edge를 내라.

주변인이 되라.
만약 스스로 중심인이어서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다면,
최소한 변두리를 여행이라도 해 보라.


붕괴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변화시키고 탈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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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1974년 = 경부고속철도 신선건설 필요성 제기(IBRD)

▲ 1983∼1984년 = 경부고속철도 타당성 조사(국토개발연구원)

▲ 1992. 4 = 노선결정

▲ 1992. 6 = 경부고속철도 1단계 착공

▲ 1994.11 = 환경영향평가 및 협의

▲ 1999. 9.13= 정우규 박사, 경남 양산 천성산서 산지늪 발견

▲ 2001. 7.16= 천성산 습지보전 및 불법 임도개설 반대 공동대책위 결성

▲ 2002. 1.22∼2.15= 지율, 내원사 비구니와 '천성산 살리기 전국순례'

▲ 2002. 2. 1= 환경부,천성산 화엄늪 습지보호지역 지정

▲ 2002. 6. 1= 경부고속철도 2단계(대구∼부산 118.3㎞) 착공

▲ 2002. 7.27= 공사중지 및 사업추진방향 모색을 위한 합동대책협의회 구성

▲ 2002.12. 4= 노무현 후보, 천성산 터널 백지화 등 공약

▲ 2003. 2. 5∼3.14= 지율, 부산시청 앞 1차 단식농성(38일)

▲ 2003. 3. 7= 노 대통령, 부산 고속철 재검토 지시

▲ 2003. 3.11= 경부고속철 대구이남 공사발주 전면중단

▲ 2003. 3.14= 지율, 38일만에 단식중단

▲ 2003. 5.12= 건교부와 시민단체, 노선재검토위 구성

▲ 2003. 9.19= 정부, 금정산.천성산 터널 원안대로 강행 결정

▲ 2003.10. 5∼11.17= 지율, 부산시청앞 2차 단식농성(45일)

▲ 2003.10.15= 고속철 천성산 관통저지 대책위, 공사금지 가처분신청 제기

▲ 2003.11.17= 지율, 45일만에 단식중단

▲ 2003.12. 2= 천성산 구간 공사시작

▲ 2004. 3.31= 지율, 45일간의 단식일기 「지율, 숲에서 나오다」출간

▲ 2004. 4. 9= 울산지법, 가처분신청 각하 및 기각

▲ 2004. 6.11= 경찰, 지율 공사방해 혐의 불구속 입건

▲ 2004. 6.30∼8.26= 지율, 청와대앞 3차 단식농성(58일)

▲ 2004. 8.25= 정부, 항고심 판결때까지 공사중단 약속.공사중단

▲ 2004. 8.26= 지율, 58일만에 단식 중단

▲ 2004.10.19= 환경부 "천성선 터널 습지영향 없다" 독자 검토 결과 발표

▲ 2004.10.27= 지율, 부산시청 앞 4차 단식농성

▲ 2004.11.29= 단식 34일째. 부산고법, 가처분신청 항고심 각하 및 기각

▲ 2004.11.30= 단식 35일째. 천성산 구간 96일만에 공사 재개

▲ 2004.12.29= 단식 64일째. 지율, 청와대앞서 단식 계속

▲ 2005. 1.13= 단식 79일째. 지율, 천성산 생태자료 '초록의 공명' CD배포

▲ 2005. 1.21= 단식 87일째. 지율, 돌연 잠적

▲ 2005. 1.24= 단식 90일째. 종교계 인사 10여명, 지율 단식에 동참

▲ 2005. 1.27= 단식 93일째. 지율 스님 위한 철야기도 입재식

▲ 2005. 1.30= 단식 96일째. 지율, 서초동 정토회관서 단식 계속

▲ 2005. 2. 2= 단식 99일째. 지율, 저혈압 증세 심각

▲ 2005. 2. 3= 단식 100일째. 정부, 국회 건교위 중재안 수용. 지율 단식중단.

(서울=연합뉴스)

2005.02.03 23:4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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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 항쟁 일지

2009. 10. 28. 20:45
<부안사태 일지>


-7월 10일 전북 부안군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유치 선언

-7월 11일 부안수협 앞에서 원전시설 반대 첫 시위

-7월 15일 부안군 위도 원전시설 부지 사실상 확정

-7월 22일 핵 반대ㆍ군수 퇴진 군민 1만인 궐기대회

-7월 24일 원전시설 부지 최종 확정

-7월 29일 국무회의에서 ‘현금보상 배제’ 결정

-7월 30일 군민 100여명 상경 투쟁

-7월 31일 격포항 앞에서 대규모 해상 시위

-8월 1일 1만인 촛불집회 시작

-8월 3일 부안군 이장단 집단 사퇴

-8월 7일 김종규 군수 소환 운동 돌입

-8월 13일 서해안고속도로 점거 시위

-8월 25일 부안지역 초ㆍ중ㆍ고교 등교 거부 투쟁 돌입

-8월 28일 정부-핵 반대 공동선언문 채택 결렬

-9월 8일 김종규 군수 내소사에서 감금,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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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6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30년 전 오늘 한 사람은 총을 맞아 죽었다.
100년 전 오늘 , 한 사람을 총을 쏘아 죽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은 30년 전 죽은 박정희를 회상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그들은 회상을 넘어, 죽은 박정희를 되살려내려고 한다. 이맘때쯤 늘 등장하는 '박정희 재평가론'이다.

오늘 중앙일보에도 기사가 났었다. 헛소리 같지만, 그래도 그들 주장의 근거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정독했다.
박정희 재평가의 이유는?
1. 박통 덕분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빠른 시일 내에 일구었다.
2. 사회 전반을 근대화했다.
3. 개인적으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4.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었을 때 많이 슬퍼했다."

이 중에서 뒤의 두 개는 왜 거론되는지 모를 정도로, 근거로서 불충분하다는 걸 느낄 거다. 개인적인 청렴도를 따지자면 박정희보다 훨씬 청렴한 사람이 많으며, 어떤 이들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청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박정희보고 지금의 극빈층처럼 살아보라고 했으면, 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육영수 여사 얘기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동정심에 호소하는 오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앞에 두 개. 아마 그들도 주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공적으로 들 것이다. 그러면서 늘 하는 말.
"빠른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보다 카리스마(어느 정도의 독재, 권위주의)가 필요할 때가 있다. 긴급조치는 필요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평가한 것은 노무현과 악마적인 좌익 세력의 음모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다.

이영훈 교수 `식민시대에 대한 재해석 필요 _ 중앙일보, 2008.4.16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112624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과 함께 최근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를 출판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15일 "식민시대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다시한번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날 오후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대학생 단체의 초청으로 열린 '한국근현대사의 재인식' 강연에서 "한국인은 일제의 억압 차별 속에서도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나폴레옹 민법을 토대로 한 '민사령'을 들여온 것은 유럽에서 발생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한국으로 들어온 것과 같다"며 "문명의 흐름이 큰 파도를 타고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해왔던 이 교수는 "자율적 근대화가 아닌 식민지 과정을 거친 것이 우리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가 발전하는 등 근대로 전환할 사회적 명분을 축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토지 수탈'로 보고 있는 기존의 역사학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이는 일제를 악마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토지조사사업을 두고 진짜 소설을 쓴 사람은 소설가 조정래"라며 "수탈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소설에 그대로 써 소설을 읽은 젊은이들이 치를 떨고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박정희는 역사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그 스스로도 일본군 소좌 출신이었으니, 일본인으로서 자기 나라의 공적 정도는 알았어야겠지. 그래서 일제가 행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벤치마킹한 것일까?
벤치마킹의 근거를 대 보라고? 아마 당신들보다는 훨씬 많이 댈 거다.

1. 일제의 경부선 개통은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이다.

2.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은 박정희의 군사주의 교육이다.

3. 일제는 황국신민선서를 강요했고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강요했다.

4. 일제는 말했다. "근대화를 위해 너희들의 자유와 독립을 약간 제한할 필요가 있다."

5. 박통은 말했다. "근대화를 위해 너희들의 자유와 생명을 약간 제한할 필요가 있다."

6.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했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독립심과 민족의식을 팔아먹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일본 수교를 하면서 무엇을 팔아먹었는지 공부해 보시길.)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 양원제 의회를 확립한 것과 같이,
우리의 다카키마사오(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도 한국에 유신헌법을 확립했다.
(고 말하면 일본인들이 화를 내려나?;;)


안중근 의사는 살아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그는 독립 투사이면서, 민초들의 편에서 민초들을 위해 싸운 민권운동가였다.(오늘 아침에 무슨 다큐에서 본 내용이다.)

만약 저승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의 영령은 또 한번 총을 쏘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망령을 향해.
그의 망령과, 망령의 추종자들의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아, 만약 안중근 의사의 영령께서 저승사자랑도 친하시다면,
제발 전두환 노므시키 좀 데려가 달라고 말해 보시길.
개도 요즘 자꾸 TV에 나오면서 자기 생명을 더 연장하고 있으니.(나올 때마다 욕을 더 먹어서 명이 길어지는 거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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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학교들

2009. 10. 21. 19:24

고등학교 목록

종교가 조직이 되어도,
괜찮을까?

생각만 하지 말고, 차근차근 만나가 보자.


가톨릭계 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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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고

2009. 10. 21. 19:21
http://www.meisterschool.or.kr

얼마나 의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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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2009. 10. 12. 19:58
미래 : 새로움, 떨림, 두려움, 흥분
향수 : 익숙함, 고요, 평화, 침잠

→ 향수에 바탕을 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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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모든 매체에서 한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나영이' 사건.
나영이.

우선 이 글에서는 임시로, '그 사건'이라고 부르자.
왜냐고? 나는
'그 사건' 자체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사건'을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해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피해자학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거의 발달되어 있지도 않지만, 형법의 철학과 역사가 조금이라도 중시되는 나라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 아니, 굳이 연구까지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를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대해 누가 반론을 제기할까? 재판에서는 흔히 원고(검사)와 피고(범죄자)의 대결 구도가 주목을 끌지만, 그 주목받지 못하는 방청석 구석에서 피해자와 그/녀의 가족들은 항상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건을 명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매체가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 사건의 내용보다도 사건의 이름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의 이름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와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회자된다. 그 기간이 얼마나 길게 갈지도 모른 채.(물론 우리 사회의 특성 상 그리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


회자(膾炙)된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지?

회膾 : 잘게 저민 날고기 / 회치다
자炙 : 고기를 굽다


'나영이 사건'이 회자된다.
'나영이 사건'이 잘게 저며지고, 회쳐지고, 고기 굽듯 구워져서, 사람들에게 소비된다.
'나영이'가 잘게 저며지고, 회쳐지고, 고기 굽듯 구워져서, 사람들에게 씹힌다.(알다시피, '씹히다'는 속된 의미로 '부정적으로 거론되다'는 뜻이다.)

라고 느끼는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까?

물론 '나영이'는 가명일 것이다.(만약 가명이 아니라면, 그 사건 이름을 최초로 붙인 사람은 나영이를 정말 두번 죽이는 살인자다!)
그렇지만 나는 불편하다.
사실 내 친구 중에도 나영이가 있는데, 뉴스에서 '나영이 사건'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용을 들을 때마다 섬찟섬찟 놀라곤 한다. 마치 친구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겨우 친구 이름이 나영이라도 이렇게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나영이들 - 솔직히 '나영'은 너무나도 흔한 이름이다. - 의 마음은 어떨까?


꼭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도 사람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차라리,
가해자를 연상시키는 가명을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도리어
'철수아저씨 사건'이라고 붙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앗, 이름이 철수이신 분께 죄송합니다. 그냥 국어책에 나오는 이름이라 생각해 주세요. 꾸벅.)

어떤 이름(가명일지라도)을 사회에 어쩔 수 없이 회자시켜야 한다면,
피해자의 이름보다는 가해자의 이름을 회자시키는 게
피해자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지 않을까?
가해자에게도 심리적, 사회적 형벌이 더 크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우리도 회자, 즉 씹는 맛이 더 났을 것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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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벅스뮤직을 안 쓴지 오래되고...
멜론도 빌려쓰는 지경이라 예전 음악을 잘 안 들었다.

오랜만에 카이스트 OST 들으려고 검색했는데,


없.
었.
다.

멜론이야 음원 구매 안 된 건 아예 검색도 안되는 데지만,
벅스는 그래도 못 들어도 뜨기는 뜨던데...

그것마저 없어져 버렸다.

물론,
지금 와서 10년도 더 된 드라마 OST 누가 듣겠나? 돈 안되는 장사다. 그건 인정.
그러나,
추억의 무게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 때의 노래들, 노래를 들으며 느낀 열정과 감동들,
자본주의는 이제 그것마저
돈으로 환산하려 하나?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주지.



"얼마야?! 얼마면 돼?!!"
(가을 동화의 원빈 버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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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살가운 우리 땅이름 ‘너더리’와 ‘너섬’

[한국경제] 2008년 12월 19일(금) 오전 11:08 가  가| 이메일| 프린트 


197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날이다.

국토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잇는 길이 428㎞의 대역사였다.

이로 인해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산업화시대의 막을 올렸다.

경제 대동맥이랄 수 있는 이 경부고속도로를 서울에서 빠져 나가면서 처음 만나는 분기점이 판교 나들목이다.

행정관할이 성남시 분당구인 판교는 지금 판교~구리 고속도로,서울외곽순환도로와 만나고 판교신도시 개발이 한창인 교통요충지로 변했지만 당시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 속해 있던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판교IC는 경부고속도로의 탄생과 더불어 그렇게 '판교'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말 연구자들 사이에선 이 판교란 이름을 두고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어 왔다.

본래 부르던 마을 이름을 한자로 잘못 바꾼 것이라는 게 요지이다.

이곳은 원래 조상 대대로 '널다리' '너더리'로 부르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을 일제 때 행정구역 정비를 하면서 '널빤지 판(板),다리 교(橋)'를 취해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널다리' 또는 '너더리'의 '다리'나 '더리'는 다리(橋)와는 전혀 상관없는,'들(野)'이 변형된 말이라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말과 땅이름에 관심을 두고 전국 각지의 지명을 연구해온 배우리 선생은 "널다리나 너더리의 '다리' '더리'는 원래 '들'을 뜻하며 '다리(橋)'는 아니었다. '널다리'에서의 '널'도 널빤지를 뜻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넓음(廣)'의 뜻을 담는 말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다만 성남시 분당구는 홈페이지를 통해 이와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는데,판교 지명의 유래를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운중천)에 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판교는 본래 '넓은 들'을 뜻하는 '널다리',또는 그것이 변해 '너더리' 마을로 불리던 곳이라는 점이다.

우리 고유의 감칠맛 나는 땅이름을 한자 지명에 밀려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만 셈이다.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살갑고 정겨운 지명이 한자 이름의 그늘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으로는 서울의 여의도(汝矣島)도 대표적이다.

우리가 너무도 흔히,아무 의심 없이 불러온 '여의도'이지만 사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말은 조선시대에 나의주(羅衣洲) 또는 잉화도(仍火島)란 또 다른 이름과 함께 비교적 일찍부터 한자어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이런 한자말이 모두 본래 고유의 땅이름을 소리나 뜻을 빌려 옮겨 적으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곳은 예부터 한강 가운데에 '너른 벌이 있는 섬'이란 뜻에서 '너벌섬'으로 불렸다.

너벌섬은 더 줄어 '너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우리 선생이나 국립지리원의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여기서 '너'와 비슷한 소리를 빌려 나(羅)를 취하고,'벌'이란 소리를 살리기 위해 옷의 옛말인 '벌'을 뜻하는 한자 '의(衣)'를 취해 '나의주'라 했다고 한다.

여의동 주민센터 홈페이지에서는 특히 '-주(洲)' 표기에 관해 이곳이 본래 고립된 섬이 아닌 현재의 영등포동에 이어진 삼각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도 '너벌섬'에서 '너의섬'으로 바뀌고,다시 '너'의 뜻을 빌린 여(汝)와 소리를 빌려 표기한 의(矣)에 섬 도(島) 자를 붙여 만든 것이다.

'잉화도'의 잉(仍)은 우리말의 '너,나'를 적기 위한 한자 표기이고,'화(火)'는 곧 '불'이므로 비슷한 소리인 '벌'을 나타내기 위한 표기로 풀이된다.

어쨌거나 한자가 득세하던 시절에 우리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소리와 뜻을 빌려 옮긴 희한한 말이 '여의도'인 것이다.

여의도나 판교란 지명을 지금 와서 새삼스레 바꿀 수도,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겠지만, 적어도 뜻도 모를 한자말보다는 우리 본래 말인 '너벌섬'이나 '너섬' '너더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상 잊혀져가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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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잡지 「풋,」 읽으면서
春川의 고유어 지명이 '봄내'라는 것을 들었다.

봄내,
봄내





발음할 수록 너어무 예쁘다.
이런 지명들이 왜 춘천이라는, 딱딱하고 흐린 한문으로 바뀐 걸까?
(춘천...하면 무언가 밝지 않고 흐리고 희뿌옇고 그늘지다. 춘천호의 이미지 때문에? 아니면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 때문에?)



생각난 김에 고유어로 된 지명 찾아봤다.
혹시나 알고 있는 고유어 지명 있으면,
올려주시길.
(가능하다면 지금 지명이랑 비교해서^^)

                                                                                                     

벌말(현재는 평촌)
빛고을(현재는 광주)


지하철역명 : 보라매(7), 버티고개(6), 장승배기(7), 굽은다리(5), 독바위(6), 선바위(4), 광나루역(5), 돌곶이(6), 당고개(4)
:

이화여대병설 미디어고등학교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위치, 미디어특성화 고등학교, 인터넷, 영상미디어 등 수업 안내.
http://www.ewhamedia.hs.kr/
02-2209-0146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1동 220


은평웹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위치.
http://eunpyeong.cschool.net/

한강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4가 위치.
http://www.hangang-ech.hs.kr/


예산정보미디어고등학교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위치.
http://www.ygc.hs.kr/

상일미디어고등학교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위치, 특성화고등학교 소개.
http://www.sangilmedia.hs.kr/


선린인터넷고등학교 멀티미디어과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위치.
http://www.sunrint.hs.kr/wiz/wizard/frames/server_index.htm ...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경기도 안산시 와동 위치.
http://www.dimigo.hs.kr/
031-439-5578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산27-1

여우사이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방송국, 방송일지, 사연, 신청곡, 다시듣기 등 제공.
http://cast.dimigo.kr/

:
어제, 구운중학교 수학멘토링 2학년 5반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느낀 것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아이들을, 5명만 모여도 서로 다른 흐름과 성향을 지니는 아이들을, 40명을 모아서 일률적인 시공간 안에 가두어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학교는 아이들에게 충분히 미안해해야 한다.

  그 미안함을 잊지 말자. 학교에서 가능한 변환 프로그램을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 틈새를 뚫어야 한다.
:

[ 교육인류학 최종보고서 ]

 

아동의 버릇 고치기와 관련된 교육 문화

―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중심으로

 

국어교육과 2001-*****   홍수봉

 

 

 

1. 연구의 배경과 동기

 

2005년 9월 10일,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TV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이하 ‘우리아이’로 씀)>라는 프로그램으로, 당시에는 채원이라는 아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쳐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채원이의 욕을 고치기 위해 가족들이 행하는 교육 방식이, 내 눈에는,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교육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충격에 가까운 폭력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는 “감동받았다”, “정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다”라는 의견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내가 결코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우리아이>의 시청자들은 교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같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까? 대체 시청자들이 <우리아이>를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에서 나는 이 연구를 시작했다.

 

 

2.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

 

나는 처음에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의 잣대로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 교육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가면서, 내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시청자 중에는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원이라는 아이를 보고 거의 즉발적으로 ‘이 애는 이렇게 교육해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육적 반응’ 속에는 ‘교육’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아이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을 교육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생각 없이 대응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성찰을 거치지 않은 채로 어떤 현상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교육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교육관을 고민하기 전에 이미 저마다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니고 있고, 그렇게 체화(體化)되어 있는 교육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교육이라고 여겨진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교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교육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이 반성적 성찰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교육이고 무엇이 교육이 아닌지 말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교육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문화는 성찰 이전에 이미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삶의 양식이자 상식적 신념이다. 문화는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몸의 길’이다. <우리아이>를 보고 난 후의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교육에 대해 고찰하기 이전에 이미 교육이라고 여기고 있는 ‘교육 문화’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이 아니라 ‘교육 문화’ 현상으로 보기로 했다. 나는 이번 연구에서 <우리아이>를 둘러싼 교육 문화 현상 속에 작동하는 문화적 장치와 기제를 탐구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3. 현상에 다가가기

 

1) 현상을 초점화하기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아이>의 소재가 되고 있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을 가공해서 제공하고 있는, <우리아이> 프로그램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아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생각이다.

이 중에서 나는 세 번째 현상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지 작성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우선 시청자가 되어 볼 필요가 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아이>와의 접속으로 인해 생긴 것이므로, 시청자들의 반응이 나온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우리아이>를 보면서 그 프로그램이 어떤 교육적 반응을 어떻게 자극하고 있는지 느껴야 했다. 그래서 <우리아이>를 보면서, 특히 그 중에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교육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에 대해 관찰지를 써 보았다. 단, 나의 교육관이 미리 개입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 1>로 첨부하고 관찰지를 요약해 보겠다. <우리아이>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가족 전체의 생활 패턴 바꾸기, 어린이집에 보내기, 잘못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기 등의 방법이 제안되었다. 가장 강조된 교육 방법은, ‘제대로 된 훈육 하기’였다. <우리아이>에서는 채원이가 욕을 했을 때 전문가 혹은 가족들이 채원이를 훈육하는 과정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훈육의 과정을 매우 ‘교육적’으로 보고 있었다.

 

3)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 읽기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기술지를 쓴 후에,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 들어가서 ‘채원이네편’에 관한 글을 모두 읽었다. 시청자 의견에 올라온 글 중에는 인터넷 문화의 특성상 매우 감정적이고 인신공격적인 글도 많았기에 그런 글은 우선 제외했다.

시청자 의견에는 크게 나누어 <우리아이>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글이 있었고, <우리아이>를 통해 비춰지는 채원이에 대한 글이 있었다. <우리아이> 프로그램에 대한 글은 프로그램의 의도,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교육 문화와 관련성이 적다고 생각하여 제외했다. 그래서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중에서 채원이를 교육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이나 반응이 담겨있는 글을 발췌하여 읽었다. 최종적으로 55개의 글이 지속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다.

 

4)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의 흐름들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단지 다양한 의견이 많이 나와 있다는 양적인 풍부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글에서도 여러 가지 층위의 의견들이 나왔고, 하나의 글 속에도 여러 갈래의 경계선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똑같이 “때려야 한다”는 의견으로 요약하기에는, “때려야 한다”는 언어가 배치되어 있는 맥락이 너무나도 다양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55개의 글들을 몇 번에 걸쳐 읽으면서 글 안에 담겨있는 ‘주제어’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주제어들을 연관성에 따라 몇 갈래의 흐름으로 엉성하게 묶어보았다.

 

① 때려서 교육시켜라. / 선택적으로 때려라. / 때리면 안좋다.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②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하다.

③ 생각하는 의자 안좋다 / 좋다.

④ 아이의 탓이 아니라 환경의 탓이다. / 아이의 타고난 인성 탓이다.

⑤ 친구가 필요하다.

⑥ 채원이 너무 천사같이 변했다. 감동받았다.

 

 

 

4. 흐름의 선택과 질문의 수정

 

위의 목록은 복합적인 글의 흐름들을 최소한의 성긴 그물로 엮어본 것이다. 이런 모든 흐름들을 심층적으로 다루기는 힘들기 때문에, 나는 이 가운데서 하나의 흐름을 선택하여 연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흐름을 선택할 것인가? 처음에 내가 가진 질문은 “시청자들이 왜 <우리아이>에서 교육적 감동을 느끼는가?”였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나는 그 교육적 감동이 폭력적 교육을 지지하는 교육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어 보니, 내 예상과는 다른 현상이 드러났다. 채원이의 변한 모습을 보여준 <우리아이>의 마지막 방송(9월 10일)이 나간 뒤, 시청자 의견에는 주로 흐름 ⑥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아래에 몇몇 예를 든다(강조는 편집자. 앞으로도 분량에 따라 약간의 강조와 편집이 따를 것이다.).

제 목

이쁜채원이..^^

글정보

이 름 박제능(amy9067) 등록일 2005-09-10 19:57:45 조회수 159

내 용

몇 주 전 채원이 처음 볼때는 너무 어린아이가 욕을하기에 놀랬는데

오늘 마지막 방송 보니까 채원이 너무 이쁘고 예의바르게 버릇 잘 고쳐서 기쁘네요~^^

특히 어린이집 캠프날에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 많이할게요. 채원이만세~!" 하는거 너무 귀여웠어요.

채원이 예쁜얼굴만큼 예쁜말만 지금처럼 쭉 했음좋겠어요^.^ 멋진이채원 화이팅 !!

제 목

처음에 채원이를 악마라고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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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이헌규(steal320) 등록일 2005-09-10 20:00:51 조회수 517

내 용

욕하는 채원이를 보고 게시판에서 악마에 자식이다 가망이없다 등등 말이 나왔었습니다 ... 기억하실겁니다 지금 채원이를 보십시요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

지금 예고편에 아이는 아예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입니다 .... 어쩌면 채원이보다 더 레벨이 높을수도 있다는 생각해보는군요 ....

더 악마같은 아이들이 천사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천사에 아이들이 되길 바라는마음입니다 ^^

제 목

귀여운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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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형자(papas711) 등록일 2005-09-14 21:14:44 조회수 364

내 용

ㅋㅋ 채원이가 유치원에서 캠프할때 산에올라가서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말할게요 채원이 만세할때 ㅜㅜ 정말 기여웠어요...ㅜㅜ

진짜 막 내 동생이었으면 싶었다 하는 생각도 들엇구요...ㅜㅜ (이아이디는 엄마주민번호로만듬)

ㅜㅜ 흐흐 ㅋㅋ 진짜 채원이 잘생기기도하고 ㅜㅜ 정말 기엽구.. 사랑스럽네요...ㅜㅜ ^-^ ㅎㅎ

진짜 산에올라가서 소리칠때~ 뿅~♡가벼렀다니깐요 ㅜㅜ ㅎㅎ

 

그 전까지의 채원이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방송을 본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내용까지도 무서우리만치 일치하는 반응이었다. 유치원 캠프에 가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즉 시청자들은 이미 ‘천사같은 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채원이의 모습이 그것에 부합할 때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 아이의 내면이나 장기적 변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은 좋은 교육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아이>의 오락 프로그램적 성격, 그리고 ‘결과를 과정보다 중시하는 교육 문화’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처음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석을 내리면서,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처음 질문에는 ‘시청자들이 교육적 감동을 느낀 이유’와 ‘교육의 과정에서 사용된 폭력(체벌)에 대한 인식’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후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앞에 제시한 다양한 흐름 중에서 흐름 ①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특히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반응이 나오는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교육 문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그 교육 문화가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논해 볼 것이다.

 

 

5. 흐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 읽어내기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흐름 ①에 관련된 시청자 의견들을 다시 모아서 읽은 것이다. 그리고 글들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뽑아내었다. 그 자료는 <자료 2>에 첨부하겠다.

그리고 <자료 2>를 다시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주제 문장으로 다시 기술하고, 그것을 범주화해 보았다.

 

범주

주 제 문 장

채원이의 행동은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선,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쁜 행동이다.

* 체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런 심한 행동을 했을 때는 때리는 것도 필요하다.

채원이의 잘못된 행동은 채원이의 나쁜 인성에서 나온다.

나쁜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4살밖에 안된 아이라서 말로는 안통한다. 잘못하면 아프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인간도 동물이다.

군대에서처럼, 좀 맞아야 개념이 생긴다.

* 조선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의 매’가 사용되어 왔다.

이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

지금까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야 버릇이 제대로 든다.

*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어서 거름이 된다.

어릴 때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커서도 못 고친다.

* 나도 어릴 때 잘못하면 많이 맞고 자랐다.

* 어릴 때는 무섭고 싫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때린 것이 존경스럽다.

* 대부분 아이들은 때리면 잘못을 뉘우치고 빈다. 그리고 나서 부모가 때린 후에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 나서도 감동을 받는다.

매를 들지 않으면 어른을 무시한다.

채원이 기가 너무 쎄다. 부모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해야 교육이 된다.

(문장 앞머리에 *표시가 된 것은 나타나는 빈도가 높은 문장이다.)

 

주제 문장들을 읽어보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문화가 지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범주 ㉠을 보면 때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배경이 채원이의 심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을 상식적인 ‘어린 아이’의 행동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느끼며, 결국 일탈적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성있는’ 교육 목표를 지니게 된다.

범주 ㉡은 채원이라는 아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판단을 보여준다. 채원이는 나쁜 인성을 가진 아이이며, 그 인성은 말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채원이의 인성을 고치기 위해서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 즉 폭력이 필요하다. 아픔을 느끼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범주 ㉢은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교육 방법이라면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체벌을 이용한 교육에 관련된 많은 속담들도 체벌의 효용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범주 ㉣과 연결된다. 시청자들은 체벌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나도 맞고 컸다”를 든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맞으면서 컸다. 그리고 어릴 때 맞은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머리 속에서 잊혀지더라도 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시청자들은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교육을 할 때에도 습관적으로 체벌을 재생(再生)하게 된다.

습관적인 재생을 넘어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본 경우에도, 시청자들은 체벌을 좋은 교육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체벌을 통한 교육의 결과(현 시점에서의 자신의 모습)가 좋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오냐오냐 하며 기른 아이가 버릇이 없다”는 간접적인 경험도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체벌 후에 주어지는 사랑은 체벌의 교육적 감동을 더욱 증폭시켜 준다.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이러한 행위는 부모가 자신을 미워해서 체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아이는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부모의 손길에 감동을 받게 되며,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이렇듯 체벌은 ‘사랑’과 결합하여 그 폭력성을 중화시킨다. 그러는 한편, 체벌은 ‘두려움’과도 결합한다. 범주 ㉤을 보면 체벌은 채원이에게 부모의 두려움을 인식시키는 행위이다. 부모와 어른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교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범주를 살펴보면서, 범주에 따라 체벌이 정당화되는 이유와 그 문화적 성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범주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시청자들의 반응 속에는 여러 범주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위의 범주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시청자 의견 하나를 예로 들겠다.

 

제 목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는 좋은 훈육 방법?!

글정보

이 름 김선아(ksa1120) 등록일 2005-09-03 20:38:15 조회수 343

내 용

제가 어렸을 때, 잘못을 해서 어머니나 아버지께 혼날때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의 정도에 따라 회초리를 맞는 수도 달라졌죠.

 

그 혼나는 상황에서는 회초리로 맞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고, 아프니까

무조건 잘 못했다고, 가슴에서는 반성도 하지 않았으면서 입으로는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께요.”를 반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회초리를 맞고 나서 실컷 울고, 설핏 잠이 들라칠 때 부모님은 조용히 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면서 왜 회초리를 맞은 건지. 무엇을 잘 못 했던건지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비로소 제가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가슴 깊이 반성하는 순간이 바로 그 때 였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그 때, 맞아서라도 올바르게 고쳐지고 배운 것이 다행이다. 참 우리 부모님 나를 잘 키워주신 분들이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훈육방법들이 생겨났다고 해도, 예전의 훈육 방법을 미개적인, 옛 것의, 뭘 몰랐던 세대의 훈육방법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되겠지요.

 

물론, 아이에게 신체적인 체벌을 주지 않고서도 아이가 반성하고 고쳐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올바르게 교육시켜야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6. ‘체벌을 통한 교육’의 교육 문화적 과정

 

지금까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오면서, “때려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우리아이>에 한정짓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의 교육 문화적 과정으로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교육 문화의 목표 형성: 교육은 아이의 행동 바로잡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개인의 행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채원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채원이의 ‘욕하는 행동’을 대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를 질문하기 이전에 “어떻게 저런 행동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기에 채원이 정도 되는 아이들의 ‘올바른’ 모습은 착한 말만 하고 어른 말 잘 듣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올바른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일탈이라고 규정짓고 수정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그 아이의 행동을 인정하고 그 행동이 나타난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모습으로 끼워맞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2)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Ⅰ: 군사화된, 폭력에 기반한 교육 문화

특히 채원이와 같이 ‘말로는 안되는 아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말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 ― 즉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점점 ‘개념’이 생기게 된다.

폭력을 이용하여 교육하려는 문화가 형성된 원인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특히 눈에 띄었던 점은, 체벌 문화가 군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단지 남성만이 끌려가서 2년 죽치고 오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어른’의 문화 속에서 군대는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너 군대 갔다와야겠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만약 어른이 어설픈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 군대는 갔다왔니?”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듯 군대는 사람의 행동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정해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군대는 아직까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군사화된 대응 방식 역시 정당화되기 쉽다(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군대에서도 그렇게 하잖아! 군대식으로 해!”라는 말에 대해 마음놓고 비판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의 행동 수정 방법이 교육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3)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Ⅱ: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다.

이것은 체벌을 정당화해주는 또하나의 근거이다. 체벌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 도리어 체벌을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외면적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체벌은 매우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체벌의 단기적 효과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체벌로 인해 형성된 결과가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용인되는 모습일 때,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체벌은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불리게 된다.

 

4) 교육 문화의 전승: 다들 맞으면서 컸다.

이 말은 체벌에 관해 토론을 할 때 가장 할 말이 없어지는 반응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체벌을 통한 교육’이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매우 잘 드러내 준다.

체벌은 이성적으로 합의된 동의 지반에 의해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체벌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서 몸으로, 감정에서 감정으로 전승된다. 마치 군대에서 선임에게 받은 폭력을 후임에게 그대로 돌려주듯이. 체벌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해 재생산된다.

특히 체벌은 ‘사회적 감수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확산된다. 체벌을 미화하는 속담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교육’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에서도 체벌은 ‘좋은 교육’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선생 김봉두>에서 김봉두는 잘못한 아이에게 호된 회초리질을 가한다. 끝내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김봉두는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운다. 그 후 김봉두는 아이와 함께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아이를 달랜다. 이런 ‘사랑의 매’의 이미지가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공되는 상황에서, 체벌을 의식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5) 교육 문화의 두 가지 원형: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

시청자들이 긍정하는 체벌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교육 문화의 두 가지 키워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두려움과 사랑이다.

교육은 두려워야 한다. 교육하는 사람은 교육받는 대상보다 높은 위치에서,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승’의 원형은 회초리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엄한 훈장의 모습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속담까지 있다. 학생이 혹여 선생님께 이치를 따지기라도 하면, 어딜 감히 스승에게 대드냐는 식의 반응이 먼저 나온다. 아니, 심지어 대학 본부를 향한 투쟁에서도 교수‘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서 먼저 ‘예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두려움의 교육은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 강화되었다. 군복을 입고 장검을 찬 채 학생들을 통제하던 식민지형 교사는,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군부 독재와 반공 교육에 의해 교육의 군사화는 더욱 강고해졌다. 결국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교관과 사병의 관계 ― ‘폭력에 의한 두려움’에 기반한 관계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하나만 가지고는 좋은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두려움은 위력이 크지만, 그만큼 반발에도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두려움은 사랑과 결합한다. “나는 지금 너에게 체벌을 가하지만, 그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체벌을 받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저항할 명분마저 잃는다. 아니, 도리어 두려움에 기반한 사랑을 신성시하게 된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이렇게 너를 아프게 할 때, 내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니”라는 식의 희생적인 교육자의 모습.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과 함께 두려움마저도 내면화하게 된다.

 

‘엄부자모(嚴父慈母)’는 전통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원형이었다. 비록 성차별주의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짧은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발딛고 있는 교육 문화 안에서의 교육의 양태를 알 수 있다. 교육은 매양 엄해서만도 안되고, 그렇다고 자비롭기만 해서도 안된다. 사람들은 교육을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런 교육 문화 속에서 ‘사랑의 매’, “때려서라도 교육시켜라”가 가능해진 것이다.

 

 

7.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에 대한 교육적 성찰

 

지금까지 나는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통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교육 목표에 대한 문화도 있었고, 교육의 원형에 대한 문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교육 문화 자체가 정당화되고 전승되는 원리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교육 문화는 말 그대로 교육 문화이다. 그것은 아직 교육적으로 성찰되기 이전의, 삶의 양식일 뿐이다. 물론 이 교육 문화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향이 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영향이 과연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방향인지 아닌지 따져보지 않았다. 교육 문화가 교육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그 영향을 매우 위험한 영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가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1) 내가 생각하는 교육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교육 문화와 교육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교육 문화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교육의 의미는 명제적 형태로 붙박을 수 없다. 교육의 의미는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교육의 의미는 나 ‘혼자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내가 집에서 혼자 교육의 의미에 대해 글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 ― 성장하고 변화해 온 수많은 나들이 만남으로써 생성된 의미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금의 나’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라도 어설프게나마 정리해야 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글은 <자료 3> 으로 첨부하고, 여기서는 <자료 3>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옮겨보겠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 ․ 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이지도 않다?!

 

-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 현실적 맥락 ․ 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2)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

그렇다면 이제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눈으로,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의 속성을 하나하나 성찰해 보겠다.

 

교육 문화의 목표에 대해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의 목표를 ‘행동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교육 목표는 두 가지 면에서 성찰해 볼 수 있다. 첫째, ‘행동’에 대해서. 둘째, ‘올바르게’에 대해서.

 

먼저 행동을 수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육은 기본적으로 변화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분명 행동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의 수정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과 조응하여 움직이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행동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즉 행동을 바꾼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내면에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어 행동이 자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아이의 행동을 대상화하고 체벌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믿는 교육 문화는 매우 비교육적인 것이다.

 

그리고 ‘올바르게’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그 올바름의 기준으로 “천사같은 아이”를 상정하고 있다. 물론 교육의 목표에 교육 주체의 욕망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교육적 욕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대안적 성장의 욕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의 욕망, 권력의 욕망에 포섭되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천사같은 아이”라는 욕망은 과연 올바른가? 물론 욕을 안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며, 예의바른 아이는 분명 올바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아이에게 강요될 때, 그것은 도리어 억압이 된다.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채원이가 왜 욕을 하는지, 채원이의 마음 속에 어떤 갈망이 있어서 욕으로 표현하는지를 무시한 채 채원이에게 ‘착한 아이’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채원이에게 욕은 단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해소를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한 교육에서 벗어나기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 방법의 일환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이용한 교육은 군사화된 한국 사회에 의해 정당화된다.

군사화된 교육은 일차적 의미에서의 체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군사화된 대응 방식은 교육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일진회 사건 때 ‘교육적’ 대응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해병대 캠프 보내기, 스쿨 폴리스 제도 도입 등 통제와 규율 중심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기본적 속성은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맺음이다. 교육은 서로에게 성장을 가져다주고 서로의 가능성을 살려주는, ‘살림’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그러나 폭력은 ‘죽임’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폭력은 어떤 맥락에서 배치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게 된다. 교육이 인정(認定)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폭력은 부정(否定)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듯 교육과 폭력은 그 본질부터가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폭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육 문화에 폭력이 개입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지배와 통제를 위해 교육이 이용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더이상 다른 무엇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교육이 교육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의 교육이 아닌, 과정의 교육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가 좋으면 우선 가시적인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에서처럼, 사람들은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면 그것을 위한 수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긍정해버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목적지를 위해 길을 걸을 수 있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경험하고 느끼며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효율적으로 얻으려면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체벌은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벌은 한번 가해지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했다 할지라도, 체벌은 목적의 달성 여부에 관계없이 아이의 몸에 각인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대로 되살아난다.

물론 체벌의 효과가 빠르고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일 때,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일 때, 그 행동을 빠르게 멈추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 혹은 폭력적 통제가 사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통제라고 이름붙여야 한다. 교육은 인간의 장기적인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기적 목표를 위해 긴 시간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의식적 전승을 의식하기

그러나 체벌의 부정적 측면을 모두 알고 있다 할지라도, 체벌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버린다.

내가 교생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들어서 수업의 반도 못한 채로 종치기 5분 전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나는 꽤 많이 화가 났고, 그래서 순간 교탁을 탕 내리치며 “수업 그만할까?”라고 말해버렸다.

나중에 참 많이 후회를 했지만, 그 당시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했다. 내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나갔다. 물론 나는 체벌을 싫어하고 체벌을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체벌의 동선(動線)과 체벌의 응어리들은 나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전승은 변화의 강력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자동적으로 내 몸에 새겨지니까.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변화이다. 교육은 자각(自覺)과 성찰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 모습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의식적인 변화를 꾀할 수도 있다.

문제는 무의식적 전승이 교육보다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성찰은 힘들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평소에 별로 행해지지 않는, 특별한 활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편하니까. 결국 그것이 잘못된 문화라 할지라도, 무의식적 전승에 의해 우리는 그것을 충실히 재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적 전승은 교육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을 가장 민감하게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가장 그른 것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체벌은 두려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체벌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어찌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지탱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완전한 모순이다.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사랑의 매’ 역시 두려움을 먼저 준 다음에 사랑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해진다. 사랑을 먼저 주고 두려움을 주는 ‘사랑의 매’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 그런 형태의 ‘사랑의 매’는 없다. 두려움이 먼저 제공되고, 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사랑이 제공된다.

그러면 두려움이 먼저 제공된 후에, 어느 시점에서 사랑이 주어지는가? 두려움이 제공된 후에 곧바로 사랑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두려움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된 후에, 즉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반성을 한 후에야 사랑이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의 복종’에 대한 보상적 가치로써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보상은 두려움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즉 두려움과 사랑은 등가적이거나 변증법적인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은유적인 결합이다. 두려움이 원관념이고, 사랑은 보조관념으로써만 기능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랑은 두려움의 본질을 은폐시키고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매’에서 나타난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정치적인 결합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을 ‘사랑의 매’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해보면, 그 결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신체적 폭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교육을 한 적이 있다. 비록 그것은 ‘사랑의 매’의 일환으로 사용된 폭력은 아니었지만, 교육의 속성에서 두려움을 완전히 탈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래에 내가 교육 활동을 하면서 썼던 일지 중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리고 장터를 하면서...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도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긍정해 주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우선은 부드럽게 포용해주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아이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꿈 아이들에게는, 긍정을 넘어선 대결과 자극도 필요하다. 쉽게 포기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관리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책임감이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몰아칠 줄도 알게 되었다. 강하게 대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조금은 느끼게 되었다. 온냉(溫冷)을 조절하는 방법도, 조금은, 조금은 깨달았다.

 

대안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활용했다. 아이들이 동기를 가지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성의 없이 “안해요”라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었다. 장터에서 홍보 전단지를 부끄러워서 못 돌리겠다고 빼는 아이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면서 경험해보게 하였다.

내가 그렇게 두려움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이들과 충분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도 나의 그런 행동을 단지 두려움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에 기반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해서, 차악(次惡)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들의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우는 현실의 교육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충분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은 ‘사랑에 은폐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과 다르다.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폭력이 아니라 압력(壓力)의 맥락에서 활용되는 두려움이다.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게 만드는 압력, 홀로 서게 만드는 압력, 나태해지려는 아이를 추스리게 만드는 압력. 그것은 성장을 저해하는 폭력이 아니라, 성장을 자극하는 교육적인 압력이다. 마치 어미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단련시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것처럼. 그런 압력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한적으로 두려움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압력으로써의 두려움 역시, 최소화되어야 한다. 두려움의 교육을 활용하되, 그것을 정말 계획적이고 의식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도리어 사랑의 교육을 행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이들이 나의 두려움의 교육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느 순간 두려움이 교육을 넘어서고 있지는 않은지, 민감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8.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교육 문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며, 교육은 그 교육 문화를 성찰한 결과 만들어진 ‘관점’이다. 그러므로 교육 문화가 교육의 원천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교육 문화가 교육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교육 문화가 교육으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진지한 성찰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교육 문화가 진정 사람을 성장시키는 길인가, 혹은 아닌가. 그런 성찰을 통해 교육은 교육 문화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모순이다. 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에게, 네가 마시고 있는 물이 좋은 물인지 안 좋은 물인지 묻고 있는 것이니. 기존의 물을 마시고 살아온 물고기가 기존의 물 자체를 성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다른’ 물, ‘새로운’ 물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기존에 마시고 있는 물이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물인지, 아니면 오염된 물인지, 오염되었다면 어디가 오염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성찰을 통해 형성된 교육은 다시 교육 문화를 바꾸게 된다. 결국 문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교육을 상상하고, 그 교육적 상상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그만큼 더 다양한 교육 문화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교육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범벅이 되면서, 더 나은 교육적 삶도 가능해진다.

시청자 의견 중에서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라는 글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답답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의 틈새를 발견하였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한다면, 더 나은 교육을 제시한다면, 오랫동안 굳어온 교육 문화도 바뀔 수 있다. 결국 문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9. 연구에 대한 연구(硏究)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는 ‘연구’가 나 자신에 대한 기술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내내,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동시에 돌아보아야 했다. 어느 순간 생각이 가는 대로 저만치 나아가다가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내가 나아갔던 발자취를 꼼꼼히 점검해 보는 것. 마치 달팽이가 온 몸을 쭉 폈다가 다시 움츠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듯, 나의 연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특히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를 쓸 때, 나는 내 생각을 쓰고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려놓은 ‘나’를 다시 객관화해서 보면서, ‘나’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보고서를 쓰면서 용어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현상, 기술, 분석, 해석, 문화 주제, ……. 질적 연구를 둘러싼 많은 용어들은 하나하나에 대해 논문 하나씩 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연구 속에서 그 용어들을 ‘내 방식대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정의내리지도 못한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결국, 나는 일상 용어를 빌려서 내 언어를 만들어 썼다. 최대한 적합한 단어를 찾으려고 사전도 뒤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표현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이것으로 완결이지만,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교육은 행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과정이니까.

< 자료 1 ―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채원이네)’ 관찰지 >

① ‘채원이가 욕을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채원이와 놀아주지 못하고 채원이가 언제나 놀이터에서 놀면서 어른들에게 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문가는 ‘도덕 관념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주 어릴 때는 야단맞으면 나쁜 것으로, 야단맞지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즉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전문가는 처음에 채원이의 욕 보다는, 채원이의 생활 전반에 대해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규칙적 생활 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채원이가 자신에게 맞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도록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채원이와 좀 더 놀아주라, 채원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라는 등의 제안이 바로 그것이다.

 

③ 채원이에게 ‘걸맞는’ 놀이감을 사 주러 갔다. 놀이는 단지 노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감정과 사고가 발달한다는 전문가의 말. 특히 놀이를 통해 공격적 마음을 표현하게 해 줄 수 있다.

 

④ 채원이에 대한 훈육 방법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눈을 맞추고, 내용은 엄하게, 간결하게”라는 전문가의 멘트. 채원이 엄마가 채원이를 훈육할 때, 우선 구석에 데려가서 “엄마 봐. 그러지 마. 뚝.”와 같은 식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프로그램에서 “팔을 잡고 / 눈을 맞추고”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훈육 후에 따뜻한 위로를”이라는 멘트와 함께 엄마가 채원이를 달래준다. 훈육 내내 채원이는 울면서 엄마의 시선을 피한다.

 

⑤ 아버지와 채원이의 정서적․신체적 상호작용을 격려한다.

 

⑥ 채원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한다. 마치 옛 어른들이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에게 회초리를 스스로 가져오게 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또 아이가 자신이 왜 야단맞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즉 훈육이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부모 역시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⑦ 전문가가 채원이의 스티커를 가지고 있자, “만지지 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채원이는 침대에 누워서 스티커를 가지고 뒹군다. 엄마가 와서 “채원이 일어나서 해. 일어나서 안할거야? 안할거면 엄마 줘.”라고 말한다. 채원이는 스티커를 껴안고 있다가, “안할거야.”라면서 던진다. 그리고 엄마는 “제자리에 갖다 놔.”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채원이가 말을 듣지 않자 스티커를 뺏어서 가져간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부짖는다. 엄마가 와서 “뚝! 또 악쓴다, 뚝!”하니까 채원이는 울면서 “버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채원이가 스티커를 제자리에 갖다놓지 않았다고 야단을 친다. “또 이러면 엄마 이거 버려버린다~! 알았어? 대답해.” 그러자 채원이는 엄마를 외면하고 침대에서 돌아앉는다. “엄마 안봐?! 알았어. 나도 너 안봐.”하고 엄마가 가버리자, 채원이는 조금 앉아 있다가 엄마를 흘겨보며 욕을 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훈육이 시작된다. 전문가가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채원이의 팔을 잡자, 채원이는 “놔~. 아프단 말이야!”라고 소리친다. 채원이는 전문가에게 욕을 하고, 전문가는 “욕 하면 안돼.”라고 말하며 채원이와 대결하고, 채원이는 울어버린다. 채원이는 울면서 전문가에게 계속 욕을 하고, 전문가는 채원이의 팔을 꼭 잡고 “어떻게 하면 놔준다 그랬지?”라고 계속 말한다. 그리고 “선생님과 채원이의 힘겨루기”라는 자막이 뜬다. 채원이의 욕은 계속되고, 전문가 역시 팔을 잡은 채로 “뚝! 어허~그만! 뚝!”을 반복한다. 여기서 “일관된 선생님의 태도”라는 자막이 나온다. 채원이가 계속 울부짖으며 욕하고, 선생님은 계속 “그만”만 말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진다. “욕해도, 안 통해.”라고 말하는 전문가. 결국 채원이는 울기에 지쳐서 안달하다가 점점 울음을 그친다. “점차 누그러지는 채원”이라는 자막이 나오지만, 채원이의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있는 듯 하다(그림 1). 채원이의 울음이 잦아들자 엄마가 채원이 앞에 앉아서 “잘못했어 안했어.”라고 다그치고, 채원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훈계를 좀 더 하다가 안아준다. 잔잔한 배경음악 흐른다.

 

⑧ 채원이가 욕 했을 때의 할머니의 약한 대응에 대해, “할머니, 따끔하게 혼 내신 거 맞나요?”라는 멘트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문가의 훈육 방법. 훈육할 때는 그 즉시, 정면으로 눈을 맞추고, “부드럽지만 부모로서의 위엄을 가진 눈빛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 후 아이에게 그 행동이 명확히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알려주어야 한다.

 

⑨ 채원이가 모래를 뿌리자, 할머니가 채원이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큰 소리로 나무라면서 엉덩이에 체벌을 가한다. 채원이는 할머니를 외면하며 딴청을 피운다. 할머니가 계속 체벌하면서 “또 그렇게 할거야!”라고 크게 나무라자, 채원이는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요”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채원이. 그리고 “채원, 비로소 잘못을 깨달은 듯”이라는 자막이 나간다. 할머니는 꾸중을 마치면서 채원이를 안아준다. 그러나 채원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채원이가 할머니의 심정을 알아줄까요?”라는 멘트가 나간다.

 

⑩ 채원이가 잘못하고 엄마가 “어떻게 할까?!”라고 하자, 채원이는 “의자에 앉히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는 “채원이 가서 앉어. 채원이 뭐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앉아 있어.”라고 말한다. 결국 채원이는 울면서 의자에 앉혀지고, 앉자 마자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손 가만히!” “채원이 반성할 때까지 엄마가 얘기 안할거야.”라고 말하며 채원이를 훈육한다. 다른 가족들도 냉담하다. 엄마는 엄격하게 훈육을 마친 다음, 채원이를 안아준다.

 

⑪ 채원이가 이번에는 엄마에게 직접 욕을 했다. 엄마는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못했어 잘했어.”라고 다그친다. 채원이는 울먹이며 곧바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잘못했으면, 반성해. 반성 다 하구, 나중에 엄마 불러.”라고 말하고는 채원이를 의자에 앉혀두고 가버린다. 채원이는 “엄마 잘못했습니다~”라고 크게 울지만, 가족들은 하나같이 냉담하다. 채원이가 일어서자 엄마는 다시 와서 채원이를 앉으라고 꾸중하고 간다. 채원이는 할머니에 이어 아빠까지 찾아보지만, 가족들은 “아빠 왜 찾어 원이가 잘못했는데”와 같이 계속 단호하고 무뚝뚝하게 꾸짖는다. 채원이는 분위기에 질린 듯 계속 울부짖는다. 아빠가 나와서 채원이를 다시 앉게 하고는, 채원이의 잘못을 묻는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먹이면서 잘못한 것을 말한다. 채원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마지막에 엄마가 다가와서 좀 부드럽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한 뒤에 안아준다. 할머니들도 차례로 채원이를 안아주고,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채원이의 욕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 자료 2 ― 흐름 ①의 글 중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 부분만 발췌한 자료 >

무조건 두들겨 패야 됩니다.. 매 밖에 없어요..

욕하면 나쁘다는것을,, 함부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뼈속깊이 기억하게 하고싶네요.

어느정도 매를 때려서 그 아이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야죠.

때린다고 모든게 다 해결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선에서죠.

엄한 부모밑에 효자 있는 법입니다. 오냐오냐 키운 자식이 겨오르는 법입니다. 떼쓰는애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니까 밥만 잘먹습디다.

갈구세요.. 구타도 좀하고.. 애가 개념이없잖아요.. 군대갔다왓죠? 그대로 하세요.. 좀 맞다보면 개념이 생기거든요.. 우리집개도 잘못햇을때 때리면 다신안그러거든요..

조선시대때 애가르키는거 보면 패는것도 싱거운거 입니다

그 놈도 오냐오냐 한대도 안맞고 자란 놈... 어른이 다 된 지금 보고 있노라면 아주 개싸가집니다. (중략) 하여간 그 자식도 앞날이 참 걱정됨. 그런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한 체벌도 하세요!!!! 엉덩이 몇 번때린다고 애 안죽습니다=_=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

애는 맞고 자라는 것 입니다. 인간도 동물이구요.

정말 존경스럽다....예전엔 글케 무섭고 싫었었는데.... 자식농산 진짜 바로앞을보고 하는게아니라 10여년 뒤를 보고 아니 20여년뒤를보고 해야한다는걸..

그런애들은 따끔히 혼내야 한다. 나도 4살때 때 엄청쓰다가. 아빠한테 엄청 큰매로 맞았다. 그후로 난 때써본적이 없다. 나는 그 기억이 뚜렷하다. 채원이한테 매를 드는게 좋을듯. 말로만 말고. 욕을할려고 하면 맞은기억을 절때 잊지 못한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따끔하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가르쳐줘야 해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줘야 한다는 겁니다.

분명 할머니가 혼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여 그러는 것이니 앞으로 할머니도 매를 드셔야 합니다.

이쁜 자식 매한대 더 때린다고... 잘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야단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심한말을 했을땐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세우는것도 괜찮은 방법같은데 너무 방관하시는게 아닌가 싶어요.

타고난 인성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문제는 티비로 본 그애의 타고난인성에 걱정이 될뿐이다

기가너무 쎄서 기를조금 조절해야해요. 결론은 좀맞아야 될것같네요,,

(중략) 채원이 부모에게 고합니다. 당장 매를드세요 패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패라는 말이아니라 싸리나무 회초리를 100개만준비하시고 채원이가 욕하고 다른아이에게 해코지 할때마다 종아리를 피가나도록치세요 그래도 안고쳐지면 회초리를 점점굵은것으로 바꾸어주시고요 옛날 우리조상님의 지혜로운 교육법을 실천하세요 그러면 채원이는 착하고 이뿐아이로 자랄수 있습니다

어른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오냐 오냐 하시지 마시고 사랑의 매를 가져다 손바닥 또는 종아리 욕하면 3대 한번 더하면 4대 이런식으로 단호하고 따끔하게 사랑의 매를 대세요. 마음 아프실지 모르지만 지금이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학교에라도 가게 되면 고치기 더 힘듭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과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 애정을 쏟으셔야합니다. 하지만 잘못된행동과 막무가내 떼쓰기를 할때는 지금보이는 정도의 꾸중으로는 개선되지않습니다.

참..-_- 보는 내내 회초리 생각 밖에 안났습니다 조용히 엄마가 방에 데려가 아이의 잘못을 말한 후 엄하게 10대만 치고 아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악을 쓸것이 아닙니까? 채원이 같은경우는 안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하다고 손으로 빌면서 무릎꿇고 빕니다.

그러고 나서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나서의 그 감동이란!!! - -! (중략) 저는 잘못했을때 맞고 컸는데 ㅠ

그냥 욕한번하면 때리는게 최고입니다 무슨 별 요상한 방법 다써도 때리는거보다 좋은거 없습니다 욕한번할때마다 한대씩 때리다가 안고쳐지면 2대 3대 때려요 때려 다 맞으면서 컸구만

저도 아빠가 하도 무섭게 상식밖으로 때려서 저도 아빠에 대한 기억은 맞은 기억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님이 오늘 채원이 나온거 보셨다면 그 생각이 달라지실겁니다. 채원이같은 애는 타이른다고 되는거 아니거든요. 차라리 종아리든 엉덩이든 때리는 훈육이 필요해요.

(중략) 매를 안들어서 우습게 보고 영악해지는거거든요. 매를 안들고는 누구도 고칠수가 없어요. 다만.. 자주 때리면 님 글 내용처럼 무서워하니까 적당한 체벌은 있어야 합니다. 글구 자식이 부모를 무서워해야죠.

암튼 그래서 어느날 또 그러길래 제가 방에 가둬 놓고 진짜 막 때려줬어요 그러면 더 역효과 난다고 애들은 절대 때리면 안된다지만 전 솔직히 그때 참다 참다 정말 많이 때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 되었단건 아니지만 그후로 우리 아이 욕 절대 안합니다 아이가 왜 맞는지.그리고 욕을 왜 하면 안되는지.. 솔직히 채원이 정도의 아이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꺼 같아요.ㅡㅡ

체벌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었을때 거름이 되지 않나 싶네요....

솔직히 좀 맞으면서 큰다고해서 그게 아이에게 어떠한 정신적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청 맞으면서 컸잖아요? 개인적으론 그게 저에게 성장과정에서 나쁜영향을 준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가끔 제게 너무 나쁜 습관이 발견되거나 할때, 우리 엄마 아빠.. 그때 나를 방에 가둬놓고 마구마구 패서라도 공부 좀 독하게 시키고 이런 버릇은 좀 고쳐주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던데..-_-a 필요할땐 채원이도 좀 맞아야해요.

두려움이 없는 아이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략) 죽지않을 정도로 패시기 바랍니다. 말로 안될때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태를 알게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의 위협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 아이는 조금 마음이 움직일 정도의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과 교육으로 가르치십시요. 그 아이가 세상에 두려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교육이 될 것입니다.

제가 봤을때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답한것 같아요.. (중략) 이경우엔 적절한 ...사랑의 매 필요하다 봅니다...

최선책은 회초리라고 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식을 키웠던 방식이 바로 회초리 아닙니까? 아무리 채원이에게 하지마라 하지마라 해도 4살밖에 안된 아이가 말 한마디에 고쳐지겠습니까? 정 안되면 정말 회초리를 드십시요.

채원이를 보면 어른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있어보이는데, 회초리로 어른의 위엄을 보여주세요. 채원이가 할머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정말 보면서 화가나더군요. 할머니께서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려야 될듯 싶지 않나 생각합니다. (중략)

제가 커서 자식을 낳았을때 채원이의 경우라면, 전 욕하면 하는대로 입을 때려줄 겁니다. 나쁜 욕 내 뱉는 입은 쓸모없는 입이라며 입을 때려주고, 엄하게 다스려도 안되면 회초리를 들겠습니다.

약간의 매는아이에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렸을쩍 심하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엄마께서 일정한 장소로 데려가 지정된 회초리를 가져 오라고 하시구 몇대 맞아야지 괜찮을껏 같냐구 물어보십니다. 왜 잘못을 해서 맞아야 하는지도 물어보시구요. 그방법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때부터 엄마 말은 정말 잘들었구요 커서도 엄마말은 거역한 적이 한번두 없습니다..

아버지의 체벌을 엄마보다 좀더 두려운 상대여서 저도 한번 아버지가 화내시면 무서운 존재라는걸 알기에 아버지가 싫어하실만한 나쁜짓은 절대로 안합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체벌한적은 어렷을떄 딱 한번 밖에 없는데 어렷을쩍 충격이 아직까지도 가는것 같네여;; ㅎ

그만큼 적당한 체벌은 아이들 에게 좋다고 느껴집니다

그건 부모가 자제력을 잃고 폭력을 쓰는게 아니라 아이가 어려서 말로 설명만 해가지고서는 의사소통이 안되니까 그나이에 옳고 그름을 분간할수있게 알려주는 한가지 수단입니다.

우리가 어릴때 불에 손을 데고나면 불이 뜨겁고 위험한 것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처럼..욕을했을때 아픔을 느껴서 아..욕하면 아프구나 하지말아야지를 스스로 알수있다면 나쁘 버릇이 고처지겠지요. 그런식으로 고치면 뭐하냐고 하는분이 계신다면..우리도 어릴때 불은 뜨거운거야 라고 듣기만 했을때 그걸 알았습니까? 그 나이에는 정말 데어봐야 알수있는겁니다. 아직 그 수준인 거지요. 그 다음에 머리로 (데는 경험을 한적이 없더라도) 불이 위험하다는걸 감지할수있는나이가 지금 채원이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자기가 쓰는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말인지... 그러한 행동들을 고쳐주는건데 뭐가 나쁩니까??

< 자료 3 ― 내가 생각하는 교육 (2005년 12월 12일 수정) >

 

“너는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에 대해 명제적으로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워낙 추상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활용되기 때문에, “교육이란 이런거야!”라고 먼저 외연을 긋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꾸로, 제가 지금까지 (짧은 삶이지만) 살아오면서 느꼈던 ‘교육’, 혹은 ‘교육 아닌 것’들을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해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지, 변죽이라도 한번 울려볼까 합니다.

 

 

1. 내가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

 

저는 대학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학년 때까지 저는 엄청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김진명씨 소설에 감격해 마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무언가 엄청난 사명감을 느끼는, 국민교육헌장을 매우 잘 훈육받아온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1학년 가을, 한 좌파(?;) 선본에서 선거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파 선본을 하면서도 꿋꿋이 민족주의 선본을 찍을만큼, 당시에는 신념이 확고했지요^^;

그런데 한 선배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베트남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국의 침략 지원 전쟁, 그것도 돈과 권력을 위한. 만약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냐는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광인 일본놈들 따위야 천벌 받아도 싸다고 생각하던 제가 처음으로 ‘내가 평범한 일본인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공산당 선언」을 읽고, 겨울에 철거촌 현장활동을 가면서 저는 책에서 읽은 모순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의 혁명적 전환’이었지요.

저는 이것이 저에게 가장 깊은 교육적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 그리고 현실과 맞닿아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 그 두 가지 원리가 결합될 때, 가장 큰 교육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갑자기 웬 식상한 얘기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의 가치관과 정서의 50%는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저에게 ‘감동’을 준 책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저에게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계 안에서 또한 체험하고, 느끼고, 교육받습니다.

물론 책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는 것은, 제가 구성하고 있는 세계와 책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의 만남입니다. 그 접점에서, 저와 책이 소통할 때, 저는 성장하고 교육받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제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혹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책 속에서 만날 때, 저는 책이 제 안에 흡수되고, 저 또한 그만큼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세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험은, 세미나입니다. 문학 세미나, 교육 세미나, 사회과학 세미나 등 대학에서 참 많은 세미나와 토론을 겪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경험이 교육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토론의 경험들이 저의 생각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특히 문학 세미나는 단지 쟁점과 이론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경험을 공감(共感)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앞에서 든 경험 외에도 무수한 교육적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 얘기하다가는 글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또 그 경험들은 대부분 위의 세 경험과 비슷하게 묶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내가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저는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보다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이 더 많습니다. 비평준화 사립 지방 남자 고등학교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입시․폭력․훈육의 화려한 앙상블이 자행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저런 선생님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사범대에 지원했으니까요.

그 중에서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특히 이 경험은 저도 처음에는 교육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교육이 아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라 저에게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읽으셨겠죠?^^;(안읽으셨다고 지금 읽지는 마세요. 그닥 좋지 않은, 위험한 책입니다-_-) 거기서 새로 부임한 교사가 엄석대의 전횡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대를 체벌하고, 학생들도 다같이 맞는 장면이 나오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책으로 읽었을 때는, 정말 좋은 교육이다, 멋진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열린교실 학생들에게 수업 자료로 사용하면서, 비디오로 다시 한번 보았지요. 그런데 같은 장면이, 비디오에서 시청각적 이미지로 재생되니까 갑자기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더라구요. 제가 깨닫지 못하는 어떤 공포의 기억을, 제 몸은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그게 중학교 1학년 때 단체 기합 받으면서 맞았던 기억이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교육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육에서 필요악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악은 악을 이용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이루겠다는 것인데, 교육은 그 과정에서 악을 이용하는 순간 이미 교육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 때문에 제 연구 주제가 훈육과 체벌에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교육인지 아닌지 스스로 모호했던 것

 

마지막으로 이것을 교육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말 고민되었던, 난감했던 상황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독서 지도 과외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책에 너무 흥미가 없어서 결국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으로 시작했는데, 아이는 그 만화 속에서 폭력과 전쟁의 매력을 발견하더군요-_-;; 오래 토론했지만, 결국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내용은 우선 빼고 과정만 놓고 본다면, 제가 앞에서 교육이라고 주장한 ‘책읽기’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장의 방향성을 떠나, 아이 또한 교육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판단하기에 그릇된 방향으로의 변화이므로, 그것은 교육이 아닌 것일까요?

 

 

4.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속성

 

앞에서 쓴 제 경험을 다시 읽어보고, 제가 생각하는 교육의 성격을 간단히 적어보았습니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책읽기가 대표적인 예이며,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 혼자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교육이 일어나기도 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첨언하겠습니다. 특히 비폭력주의나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같은 경우, 단지 사상의 변화로는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도리어 신체의 변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신체, 감수성, 민감해지기, 공감하고 유대하기 등이 교육의 구체적인 요소들입니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교육은 이런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이 방향이 아니면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도 않다?!

 

 

 

 

글을 쓰고 나니 한편 정리되면서도, 또한편 헷갈리는군요. 특히 여기서 제가 ‘교육’의 외연을 정확하게 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교육의 외연을 정확히 그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예를 들어 치료―교육―사회적 개혁은 분명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변화를 모색할 때, 우리는 이 세 영역을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의 외연에 얽매여서 현실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되겠지요(실제로 교육자라는 사람들이, ‘이건 사회적 문제니까 나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결국,

다시 누군가 저에게 “교육이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덧붙이는 단상>

 

교육은 교육의 결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으로써 규정된다.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

 

현실적 맥락․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그 과정 전반에 ‘기존의 나’와 ‘변화한 나’ 사이의 긴장이 일어난다. 그 긴장 사이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
_출처 : 서울대 국어과 §문학학회§
작성자 : 홍수봉
작성일 : 2003.11.28



부시 미 대통령의 전세계 국가의 테러위험 노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테러 안전국가임이 밝혀졌다.

익명을 요구하는 알 카에다의 한 작전담당 책임자에 따르면, '부시의 말대로 우리는 전세계의 국가를 상대로 우리의 힘을 보여줄 준비가 완비되어 있다.

단,아직까지도 한국에 대해서만은 뾰족한 공격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공개했다.


1. 유력한 테러 목표인 국회,신문사,재벌회사 등을 공격할 경우,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이 예상되어 테러를 안하니만 못한 상황이 발생...

2. 중요 시설의 경비 막강
중요한 핵시설 관련지로 보이는 남부지방의 한 도시(?)는 주민과 방위세력의 비율이 8:1에 달할 정도로 요충지에 대한 경비가 강력함...

3. 곳곳에 산재한 특수 정보원
특수부대 요원(?)으로 보이는 제복의 군인들이 비디오 등을 들고 거리에서 달리는 자동차까지 촬영 분석하는 정보전 전개 중.

4. 극렬 테러분자들 활동 왕성..
오토바이에 가스통을 싣고 달리는 등 오히려 자신들의 조직원들보다 훨씬 대담한 자들로, 자칫 영역권문제로 대규모 분쟁이 예상됨.

5. 강력한 군사력 및 인적자원
군입대 18개월 남짓이면 다른나라 장성급의 입지를 확보하는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가진 병력의 확보. 또한 제대 후에는 눈감고 총쏘는 등의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새로운 전사로 탄생... (심지어 내기 사격을 하기도 함)

6. 장기 체류의 어려움
외국인 불법체류로 체포되어 강제 출국당함. (요즘 단속기간)

7. 전국민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외국인 테러리스트들이 목적지까지 찾아 가는 것이 대단히 곤란.. (일부러 안하는 것으로 분석)

8. 차량테러(폭탄차량)시 여러 문제점 노출
차가 막혀서 테러곤란..

9. 총기 테러시 코스프레 하는줄 알구 주변에서 디카들고 덤빔..

10. 근본적으로, '테러'의 중요한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충격과 공포, 위압 등의 효과가 전혀 없다.

그 어떤 충격적인 파괴공작을 성공시킨다해도 그것을 테러로 인식할 국민이 거의 없을터...

'또 뭐가 무너졌다냐?'
'어째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터졌구만...'

남, 녀를 불문하고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대담하고 무덤덤함.


:
교원능력평가 정착땐 인사기준 활용
교과부, 근무평정제도와 점진적 통합 추진
송길호기자 khs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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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당국이 교원능력평가를 교원 인사와 연계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교육과학기술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3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교원능력평가제도를 점진적으로 교원의 근무평가제도와 통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면서 “이는 교원능력평가제도가 학교교육의 내실화뿐 아니라 교원의 인사기준으로 활용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날 “내년에 교원능력평가제도가 모든 학교에 도입되면 근무평정, 성과급평가 등 교원에 대한 평가제도가 3원화된다”면서 “이중 교원능력평가제도는 교원의 승진과 연계되는 근무평가제도와 점진적으로 통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통합 시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대략 교원능력평가제도가 정착되는 2~3년 후로 잡고 있다”면서 “교원능력평가제도가 도입되면 통합 분위기는 무르익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교과부가 교원능력평가와 관련한 수업전문성 제고 방안을 공개하면서 교원단체들의 반발을 우려해 교원평가를 교원인사와 연계한다는 내용의 민감한 부분은 일단 제외했다”면서 “교원평가 결과 3회 이상 기준 미달 교사로 판정될 경우 사실상 직종 전환이나 의원면직에 처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일본 같은 경우 3번 기준 미달 교사로 판정나면 이들 교사에 대해 학교사무직 등 직종 전환을 유도하거나 의원면직 처분을 내리는 방안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교원능력평가를 인사와 연계하는 방침에 대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물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 등 교원 및 교사단체 등은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있어 이를 교육현장에 적용하기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앞서 2일 교과부는 ‘교원 수업 전문성 제고방안’을 마련, 현재 1570개 학교에서 시범 실시중인 교원평가제도를 내년 3월부터 전국 모든 학교로 확대·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평가기준에 미달하는 교사들에 대해선 최대 6개월간의 장기연수와 학기별 2회이상의 공개수업이 의무화될 것이라고 교과부는 밝혔다.

교과부는 또 교원의 전문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중·고교 교원들이 자신의 전공과목 외에 다른 교과목이나 통합교과목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도록 복수전공제를 도입하기로 했다.(문화일보 8월13일자 10면 참조)

송길호기자 khs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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