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인류학 최종보고서 ]

 

아동의 버릇 고치기와 관련된 교육 문화

―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중심으로

 

국어교육과 2001-*****   홍수봉

 

 

 

1. 연구의 배경과 동기

 

2005년 9월 10일,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TV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이하 ‘우리아이’로 씀)>라는 프로그램으로, 당시에는 채원이라는 아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쳐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채원이의 욕을 고치기 위해 가족들이 행하는 교육 방식이, 내 눈에는,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교육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충격에 가까운 폭력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는 “감동받았다”, “정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다”라는 의견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내가 결코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우리아이>의 시청자들은 교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같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까? 대체 시청자들이 <우리아이>를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에서 나는 이 연구를 시작했다.

 

 

2.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

 

나는 처음에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의 잣대로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 교육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가면서, 내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시청자 중에는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원이라는 아이를 보고 거의 즉발적으로 ‘이 애는 이렇게 교육해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육적 반응’ 속에는 ‘교육’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아이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을 교육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생각 없이 대응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성찰을 거치지 않은 채로 어떤 현상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교육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교육관을 고민하기 전에 이미 저마다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니고 있고, 그렇게 체화(體化)되어 있는 교육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교육이라고 여겨진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교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교육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이 반성적 성찰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교육이고 무엇이 교육이 아닌지 말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교육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교육 이전의 교육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문화는 성찰 이전에 이미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삶의 양식이자 상식적 신념이다. 문화는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몸의 길’이다. <우리아이>를 보고 난 후의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교육에 대해 고찰하기 이전에 이미 교육이라고 여기고 있는 ‘교육 문화’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을 교육 현상이 아니라 ‘교육 문화’ 현상으로 보기로 했다. 나는 이번 연구에서 <우리아이>를 둘러싼 교육 문화 현상 속에 작동하는 문화적 장치와 기제를 탐구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3. 현상에 다가가기

 

1) 현상을 초점화하기

<우리아이>를 둘러싼 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아이>의 소재가 되고 있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는 현실을 가공해서 제공하고 있는, <우리아이> 프로그램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아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생각이다.

이 중에서 나는 세 번째 현상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지 작성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우선 시청자가 되어 볼 필요가 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아이>와의 접속으로 인해 생긴 것이므로, 시청자들의 반응이 나온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우리아이>를 보면서 그 프로그램이 어떤 교육적 반응을 어떻게 자극하고 있는지 느껴야 했다. 그래서 <우리아이>를 보면서, 특히 그 중에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교육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에 대해 관찰지를 써 보았다. 단, 나의 교육관이 미리 개입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 1>로 첨부하고 관찰지를 요약해 보겠다. <우리아이>는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가족 전체의 생활 패턴 바꾸기, 어린이집에 보내기, 잘못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기 등의 방법이 제안되었다. 가장 강조된 교육 방법은, ‘제대로 된 훈육 하기’였다. <우리아이>에서는 채원이가 욕을 했을 때 전문가 혹은 가족들이 채원이를 훈육하는 과정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훈육의 과정을 매우 ‘교육적’으로 보고 있었다.

 

3)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 읽기

<우리아이>에 대한 관찰기술지를 쓴 후에,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 들어가서 ‘채원이네편’에 관한 글을 모두 읽었다. 시청자 의견에 올라온 글 중에는 인터넷 문화의 특성상 매우 감정적이고 인신공격적인 글도 많았기에 그런 글은 우선 제외했다.

시청자 의견에는 크게 나누어 <우리아이>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글이 있었고, <우리아이>를 통해 비춰지는 채원이에 대한 글이 있었다. <우리아이> 프로그램에 대한 글은 프로그램의 의도,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교육 문화와 관련성이 적다고 생각하여 제외했다. 그래서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 중에서 채원이를 교육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이나 반응이 담겨있는 글을 발췌하여 읽었다. 최종적으로 55개의 글이 지속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다.

 

4) <우리아이> 시청자 의견의 흐름들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단지 다양한 의견이 많이 나와 있다는 양적인 풍부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글에서도 여러 가지 층위의 의견들이 나왔고, 하나의 글 속에도 여러 갈래의 경계선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똑같이 “때려야 한다”는 의견으로 요약하기에는, “때려야 한다”는 언어가 배치되어 있는 맥락이 너무나도 다양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55개의 글들을 몇 번에 걸쳐 읽으면서 글 안에 담겨있는 ‘주제어’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주제어들을 연관성에 따라 몇 갈래의 흐름으로 엉성하게 묶어보았다.

 

① 때려서 교육시켜라. / 선택적으로 때려라. / 때리면 안좋다.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②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하다.

③ 생각하는 의자 안좋다 / 좋다.

④ 아이의 탓이 아니라 환경의 탓이다. / 아이의 타고난 인성 탓이다.

⑤ 친구가 필요하다.

⑥ 채원이 너무 천사같이 변했다. 감동받았다.

 

 

 

4. 흐름의 선택과 질문의 수정

 

위의 목록은 복합적인 글의 흐름들을 최소한의 성긴 그물로 엮어본 것이다. 이런 모든 흐름들을 심층적으로 다루기는 힘들기 때문에, 나는 이 가운데서 하나의 흐름을 선택하여 연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흐름을 선택할 것인가? 처음에 내가 가진 질문은 “시청자들이 왜 <우리아이>에서 교육적 감동을 느끼는가?”였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나는 그 교육적 감동이 폭력적 교육을 지지하는 교육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어 보니, 내 예상과는 다른 현상이 드러났다. 채원이의 변한 모습을 보여준 <우리아이>의 마지막 방송(9월 10일)이 나간 뒤, 시청자 의견에는 주로 흐름 ⑥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아래에 몇몇 예를 든다(강조는 편집자. 앞으로도 분량에 따라 약간의 강조와 편집이 따를 것이다.).

제 목

이쁜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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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박제능(amy9067) 등록일 2005-09-10 19:57:45 조회수 159

내 용

몇 주 전 채원이 처음 볼때는 너무 어린아이가 욕을하기에 놀랬는데

오늘 마지막 방송 보니까 채원이 너무 이쁘고 예의바르게 버릇 잘 고쳐서 기쁘네요~^^

특히 어린이집 캠프날에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 많이할게요. 채원이만세~!" 하는거 너무 귀여웠어요.

채원이 예쁜얼굴만큼 예쁜말만 지금처럼 쭉 했음좋겠어요^.^ 멋진이채원 화이팅 !!

제 목

처음에 채원이를 악마라고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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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이헌규(steal320) 등록일 2005-09-10 20:00:51 조회수 517

내 용

욕하는 채원이를 보고 게시판에서 악마에 자식이다 가망이없다 등등 말이 나왔었습니다 ... 기억하실겁니다 지금 채원이를 보십시요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

지금 예고편에 아이는 아예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입니다 .... 어쩌면 채원이보다 더 레벨이 높을수도 있다는 생각해보는군요 ....

더 악마같은 아이들이 천사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천사에 아이들이 되길 바라는마음입니다 ^^

제 목

귀여운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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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형자(papas711) 등록일 2005-09-14 21:14:44 조회수 364

내 용

ㅋㅋ 채원이가 유치원에서 캠프할때 산에올라가서 엄마아빠사랑해요 이쁜말말할게요 채원이 만세할때 ㅜㅜ 정말 기여웠어요...ㅜㅜ

진짜 막 내 동생이었으면 싶었다 하는 생각도 들엇구요...ㅜㅜ (이아이디는 엄마주민번호로만듬)

ㅜㅜ 흐흐 ㅋㅋ 진짜 채원이 잘생기기도하고 ㅜㅜ 정말 기엽구.. 사랑스럽네요...ㅜㅜ ^-^ ㅎㅎ

진짜 산에올라가서 소리칠때~ 뿅~♡가벼렀다니깐요 ㅜㅜ ㅎㅎ

 

그 전까지의 채원이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방송을 본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내용까지도 무서우리만치 일치하는 반응이었다. 유치원 캠프에 가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즉 시청자들은 이미 ‘천사같은 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채원이의 모습이 그것에 부합할 때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 아이의 내면이나 장기적 변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은 좋은 교육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아이>의 오락 프로그램적 성격, 그리고 ‘결과를 과정보다 중시하는 교육 문화’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처음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석을 내리면서,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처음 질문에는 ‘시청자들이 교육적 감동을 느낀 이유’와 ‘교육의 과정에서 사용된 폭력(체벌)에 대한 인식’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후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앞에 제시한 다양한 흐름 중에서 흐름 ①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특히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반응이 나오는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교육 문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그 교육 문화가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논해 볼 것이다.

 

 

5. 흐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 읽어내기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흐름 ①에 관련된 시청자 의견들을 다시 모아서 읽은 것이다. 그리고 글들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뽑아내었다. 그 자료는 <자료 2>에 첨부하겠다.

그리고 <자료 2>를 다시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주제 문장으로 다시 기술하고, 그것을 범주화해 보았다.

 

범주

주 제 문 장

채원이의 행동은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선,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쁜 행동이다.

* 체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런 심한 행동을 했을 때는 때리는 것도 필요하다.

채원이의 잘못된 행동은 채원이의 나쁜 인성에서 나온다.

나쁜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4살밖에 안된 아이라서 말로는 안통한다. 잘못하면 아프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인간도 동물이다.

군대에서처럼, 좀 맞아야 개념이 생긴다.

* 조선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의 매’가 사용되어 왔다.

이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

지금까지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야 버릇이 제대로 든다.

*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어서 거름이 된다.

어릴 때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커서도 못 고친다.

* 나도 어릴 때 잘못하면 많이 맞고 자랐다.

* 어릴 때는 무섭고 싫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때린 것이 존경스럽다.

* 대부분 아이들은 때리면 잘못을 뉘우치고 빈다. 그리고 나서 부모가 때린 후에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 나서도 감동을 받는다.

매를 들지 않으면 어른을 무시한다.

채원이 기가 너무 쎄다. 부모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해야 교육이 된다.

(문장 앞머리에 *표시가 된 것은 나타나는 빈도가 높은 문장이다.)

 

주제 문장들을 읽어보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문화가 지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범주 ㉠을 보면 때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배경이 채원이의 심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을 상식적인 ‘어린 아이’의 행동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라고 느끼며, 결국 일탈적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성있는’ 교육 목표를 지니게 된다.

범주 ㉡은 채원이라는 아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판단을 보여준다. 채원이는 나쁜 인성을 가진 아이이며, 그 인성은 말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채원이의 인성을 고치기 위해서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 즉 폭력이 필요하다. 아픔을 느끼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범주 ㉢은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교육 방법이라면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체벌을 이용한 교육에 관련된 많은 속담들도 체벌의 효용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범주 ㉣과 연결된다. 시청자들은 체벌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나도 맞고 컸다”를 든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맞으면서 컸다. 그리고 어릴 때 맞은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머리 속에서 잊혀지더라도 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시청자들은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교육을 할 때에도 습관적으로 체벌을 재생(再生)하게 된다.

습관적인 재생을 넘어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본 경우에도, 시청자들은 체벌을 좋은 교육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체벌을 통한 교육의 결과(현 시점에서의 자신의 모습)가 좋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오냐오냐 하며 기른 아이가 버릇이 없다”는 간접적인 경험도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체벌 후에 주어지는 사랑은 체벌의 교육적 감동을 더욱 증폭시켜 준다. ‘사랑의 매’로 대표되는 이러한 행위는 부모가 자신을 미워해서 체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아이는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부모의 손길에 감동을 받게 되며,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이렇듯 체벌은 ‘사랑’과 결합하여 그 폭력성을 중화시킨다. 그러는 한편, 체벌은 ‘두려움’과도 결합한다. 범주 ㉤을 보면 체벌은 채원이에게 부모의 두려움을 인식시키는 행위이다. 부모와 어른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교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범주를 살펴보면서, 범주에 따라 체벌이 정당화되는 이유와 그 문화적 성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범주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시청자들의 반응 속에는 여러 범주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위의 범주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시청자 의견 하나를 예로 들겠다.

 

제 목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는 좋은 훈육 방법?!

글정보

이 름 김선아(ksa1120) 등록일 2005-09-03 20:38:15 조회수 343

내 용

제가 어렸을 때, 잘못을 해서 어머니나 아버지께 혼날때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의 정도에 따라 회초리를 맞는 수도 달라졌죠.

 

그 혼나는 상황에서는 회초리로 맞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고, 아프니까

무조건 잘 못했다고, 가슴에서는 반성도 하지 않았으면서 입으로는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께요.”를 반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회초리를 맞고 나서 실컷 울고, 설핏 잠이 들라칠 때 부모님은 조용히 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면서 왜 회초리를 맞은 건지. 무엇을 잘 못 했던건지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비로소 제가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가슴 깊이 반성하는 순간이 바로 그 때 였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그 때, 맞아서라도 올바르게 고쳐지고 배운 것이 다행이다. 참 우리 부모님 나를 잘 키워주신 분들이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훈육방법들이 생겨났다고 해도, 예전의 훈육 방법을 미개적인, 옛 것의, 뭘 몰랐던 세대의 훈육방법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되겠지요.

 

물론, 아이에게 신체적인 체벌을 주지 않고서도 아이가 반성하고 고쳐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올바르게 교육시켜야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6. ‘체벌을 통한 교육’의 교육 문화적 과정

 

지금까지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읽어오면서, “때려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우리아이>에 한정짓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의 교육 문화적 과정으로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교육 문화의 목표 형성: 교육은 아이의 행동 바로잡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개인의 행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채원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채원이의 ‘욕하는 행동’을 대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를 질문하기 이전에 “어떻게 저런 행동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기에 채원이 정도 되는 아이들의 ‘올바른’ 모습은 착한 말만 하고 어른 말 잘 듣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올바른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일탈이라고 규정짓고 수정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그 아이의 행동을 인정하고 그 행동이 나타난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모습으로 끼워맞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2)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Ⅰ: 군사화된, 폭력에 기반한 교육 문화

특히 채원이와 같이 ‘말로는 안되는 아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말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 ― 즉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점점 ‘개념’이 생기게 된다.

폭력을 이용하여 교육하려는 문화가 형성된 원인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 의견을 읽으면서 특히 눈에 띄었던 점은, 체벌 문화가 군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단지 남성만이 끌려가서 2년 죽치고 오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어른’의 문화 속에서 군대는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너 군대 갔다와야겠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만약 어른이 어설픈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 군대는 갔다왔니?”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듯 군대는 사람의 행동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정해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군대는 아직까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군사화된 대응 방식 역시 정당화되기 쉽다(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군대에서도 그렇게 하잖아! 군대식으로 해!”라는 말에 대해 마음놓고 비판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의 행동 수정 방법이 교육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3) 교육 문화의 정당화 기제 Ⅱ: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다.

이것은 체벌을 정당화해주는 또하나의 근거이다. 체벌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 도리어 체벌을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외면적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체벌은 매우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체벌의 단기적 효과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체벌로 인해 형성된 결과가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용인되는 모습일 때,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체벌은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불리게 된다.

 

4) 교육 문화의 전승: 다들 맞으면서 컸다.

이 말은 체벌에 관해 토론을 할 때 가장 할 말이 없어지는 반응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체벌을 통한 교육’이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매우 잘 드러내 준다.

체벌은 이성적으로 합의된 동의 지반에 의해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체벌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서 몸으로, 감정에서 감정으로 전승된다. 마치 군대에서 선임에게 받은 폭력을 후임에게 그대로 돌려주듯이. 체벌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해 재생산된다.

특히 체벌은 ‘사회적 감수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확산된다. 체벌을 미화하는 속담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교육’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에서도 체벌은 ‘좋은 교육’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선생 김봉두>에서 김봉두는 잘못한 아이에게 호된 회초리질을 가한다. 끝내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김봉두는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운다. 그 후 김봉두는 아이와 함께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아이를 달랜다. 이런 ‘사랑의 매’의 이미지가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공되는 상황에서, 체벌을 의식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5) 교육 문화의 두 가지 원형: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

시청자들이 긍정하는 체벌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교육 문화의 두 가지 키워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두려움과 사랑이다.

교육은 두려워야 한다. 교육하는 사람은 교육받는 대상보다 높은 위치에서,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승’의 원형은 회초리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엄한 훈장의 모습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속담까지 있다. 학생이 혹여 선생님께 이치를 따지기라도 하면, 어딜 감히 스승에게 대드냐는 식의 반응이 먼저 나온다. 아니, 심지어 대학 본부를 향한 투쟁에서도 교수‘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서 먼저 ‘예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두려움의 교육은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 강화되었다. 군복을 입고 장검을 찬 채 학생들을 통제하던 식민지형 교사는,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군부 독재와 반공 교육에 의해 교육의 군사화는 더욱 강고해졌다. 결국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교관과 사병의 관계 ― ‘폭력에 의한 두려움’에 기반한 관계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하나만 가지고는 좋은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두려움은 위력이 크지만, 그만큼 반발에도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두려움은 사랑과 결합한다. “나는 지금 너에게 체벌을 가하지만, 그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체벌을 받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저항할 명분마저 잃는다. 아니, 도리어 두려움에 기반한 사랑을 신성시하게 된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이렇게 너를 아프게 할 때, 내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니”라는 식의 희생적인 교육자의 모습.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과 함께 두려움마저도 내면화하게 된다.

 

‘엄부자모(嚴父慈母)’는 전통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원형이었다. 비록 성차별주의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짧은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발딛고 있는 교육 문화 안에서의 교육의 양태를 알 수 있다. 교육은 매양 엄해서만도 안되고, 그렇다고 자비롭기만 해서도 안된다. 사람들은 교육을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런 교육 문화 속에서 ‘사랑의 매’, “때려서라도 교육시켜라”가 가능해진 것이다.

 

 

7.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에 대한 교육적 성찰

 

지금까지 나는 <우리아이>의 시청자 의견을 통해,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를 둘러싼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교육 목표에 대한 문화도 있었고, 교육의 원형에 대한 문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교육 문화 자체가 정당화되고 전승되는 원리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교육 문화는 말 그대로 교육 문화이다. 그것은 아직 교육적으로 성찰되기 이전의, 삶의 양식일 뿐이다. 물론 이 교육 문화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향이 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영향이 과연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방향인지 아닌지 따져보지 않았다. 교육 문화가 교육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그 영향을 매우 위험한 영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가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1) 내가 생각하는 교육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교육 문화와 교육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교육 문화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교육의 의미는 명제적 형태로 붙박을 수 없다. 교육의 의미는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교육의 의미는 나 ‘혼자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내가 집에서 혼자 교육의 의미에 대해 글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 ― 성장하고 변화해 온 수많은 나들이 만남으로써 생성된 의미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금의 나’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라도 어설프게나마 정리해야 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글은 <자료 3> 으로 첨부하고, 여기서는 <자료 3>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옮겨보겠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 ․ 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이지도 않다?!

 

-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 현실적 맥락 ․ 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2)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

그렇다면 이제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눈으로, “때려서 교육시켜라”는 교육 문화의 속성을 하나하나 성찰해 보겠다.

 

교육 문화의 목표에 대해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의 목표를 ‘행동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교육 목표는 두 가지 면에서 성찰해 볼 수 있다. 첫째, ‘행동’에 대해서. 둘째, ‘올바르게’에 대해서.

 

먼저 행동을 수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육은 기본적으로 변화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분명 행동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의 수정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기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과 조응하여 움직이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행동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즉 행동을 바꾼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내면에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어 행동이 자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아이의 행동을 대상화하고 체벌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믿는 교육 문화는 매우 비교육적인 것이다.

 

그리고 ‘올바르게’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시청자들은 채원이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그 올바름의 기준으로 “천사같은 아이”를 상정하고 있다. 물론 교육의 목표에 교육 주체의 욕망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교육적 욕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대안적 성장의 욕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의 욕망, 권력의 욕망에 포섭되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천사같은 아이”라는 욕망은 과연 올바른가? 물론 욕을 안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며, 예의바른 아이는 분명 올바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아이에게 강요될 때, 그것은 도리어 억압이 된다. 채원이의 욕하는 버릇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채원이가 왜 욕을 하는지, 채원이의 마음 속에 어떤 갈망이 있어서 욕으로 표현하는지를 무시한 채 채원이에게 ‘착한 아이’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채원이에게 욕은 단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해소를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한 교육에서 벗어나기

체벌을 통한 교육 문화는 교육 방법의 일환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이용한 교육은 군사화된 한국 사회에 의해 정당화된다.

군사화된 교육은 일차적 의미에서의 체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군사화된 대응 방식은 교육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일진회 사건 때 ‘교육적’ 대응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해병대 캠프 보내기, 스쿨 폴리스 제도 도입 등 통제와 규율 중심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기본적 속성은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맺음이다. 교육은 서로에게 성장을 가져다주고 서로의 가능성을 살려주는, ‘살림’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그러나 폭력은 ‘죽임’을 향한 관계맺기이다. 폭력은 어떤 맥락에서 배치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게 된다. 교육이 인정(認定)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폭력은 부정(否定)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듯 교육과 폭력은 그 본질부터가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폭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육 문화에 폭력이 개입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지배와 통제를 위해 교육이 이용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더이상 다른 무엇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교육이 교육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의 교육이 아닌, 과정의 교육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가 좋으면 우선 가시적인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에서처럼, 사람들은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면 그것을 위한 수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긍정해버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목적지를 위해 길을 걸을 수 있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경험하고 느끼며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효율적으로 얻으려면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체벌은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벌은 한번 가해지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했다 할지라도, 체벌은 목적의 달성 여부에 관계없이 아이의 몸에 각인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대로 되살아난다.

물론 체벌의 효과가 빠르고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일 때,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일 때, 그 행동을 빠르게 멈추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 혹은 폭력적 통제가 사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통제라고 이름붙여야 한다. 교육은 인간의 장기적인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기적 목표를 위해 긴 시간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의식적 전승을 의식하기

그러나 체벌의 부정적 측면을 모두 알고 있다 할지라도, 체벌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버린다.

내가 교생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들어서 수업의 반도 못한 채로 종치기 5분 전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나는 꽤 많이 화가 났고, 그래서 순간 교탁을 탕 내리치며 “수업 그만할까?”라고 말해버렸다.

나중에 참 많이 후회를 했지만, 그 당시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했다. 내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나갔다. 물론 나는 체벌을 싫어하고 체벌을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체벌의 동선(動線)과 체벌의 응어리들은 나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전승은 변화의 강력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자동적으로 내 몸에 새겨지니까.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변화이다. 교육은 자각(自覺)과 성찰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 모습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고, 의식적인 변화를 꾀할 수도 있다.

문제는 무의식적 전승이 교육보다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성찰은 힘들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평소에 별로 행해지지 않는, 특별한 활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편하니까. 결국 그것이 잘못된 문화라 할지라도, 무의식적 전승에 의해 우리는 그것을 충실히 재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적 전승은 교육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을 가장 민감하게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가장 그른 것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체벌은 두려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체벌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어찌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지탱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완전한 모순이다.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사랑의 매’ 역시 두려움을 먼저 준 다음에 사랑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해진다. 사랑을 먼저 주고 두려움을 주는 ‘사랑의 매’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 그런 형태의 ‘사랑의 매’는 없다. 두려움이 먼저 제공되고, 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사랑이 제공된다.

그러면 두려움이 먼저 제공된 후에, 어느 시점에서 사랑이 주어지는가? 두려움이 제공된 후에 곧바로 사랑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두려움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된 후에, 즉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반성을 한 후에야 사랑이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의 복종’에 대한 보상적 가치로써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보상은 두려움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즉 두려움과 사랑은 등가적이거나 변증법적인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은유적인 결합이다. 두려움이 원관념이고, 사랑은 보조관념으로써만 기능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랑은 두려움의 본질을 은폐시키고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매’에서 나타난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정치적인 결합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사랑의 교육’을 ‘사랑의 매’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해보면, 그 결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신체적 폭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교육을 한 적이 있다. 비록 그것은 ‘사랑의 매’의 일환으로 사용된 폭력은 아니었지만, 교육의 속성에서 두려움을 완전히 탈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래에 내가 교육 활동을 하면서 썼던 일지 중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리고 장터를 하면서...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도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긍정해 주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우선은 부드럽게 포용해주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아이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꿈 아이들에게는, 긍정을 넘어선 대결과 자극도 필요하다. 쉽게 포기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관리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책임감이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몰아칠 줄도 알게 되었다. 강하게 대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조금은 느끼게 되었다. 온냉(溫冷)을 조절하는 방법도, 조금은, 조금은 깨달았다.

 

대안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활용했다. 아이들이 동기를 가지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성의 없이 “안해요”라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었다. 장터에서 홍보 전단지를 부끄러워서 못 돌리겠다고 빼는 아이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면서 경험해보게 하였다.

내가 그렇게 두려움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이들과 충분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도 나의 그런 행동을 단지 두려움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에 기반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해서, 차악(次惡)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들의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우는 현실의 교육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충분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의 교육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전제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은 ‘사랑에 은폐된 두려움’에서의 두려움과 다르다.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폭력이 아니라 압력(壓力)의 맥락에서 활용되는 두려움이다.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게 만드는 압력, 홀로 서게 만드는 압력, 나태해지려는 아이를 추스리게 만드는 압력. 그것은 성장을 저해하는 폭력이 아니라, 성장을 자극하는 교육적인 압력이다. 마치 어미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단련시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것처럼. 그런 압력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한적으로 두려움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압력으로써의 두려움 역시, 최소화되어야 한다. 두려움의 교육을 활용하되, 그것을 정말 계획적이고 의식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도리어 사랑의 교육을 행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이들이 나의 두려움의 교육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느 순간 두려움이 교육을 넘어서고 있지는 않은지, 민감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8.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교육 문화와 교육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교육 문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며, 교육은 그 교육 문화를 성찰한 결과 만들어진 ‘관점’이다. 그러므로 교육 문화가 교육의 원천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교육 문화가 교육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교육 문화가 교육으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진지한 성찰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교육 문화가 진정 사람을 성장시키는 길인가, 혹은 아닌가. 그런 성찰을 통해 교육은 교육 문화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모순이다. 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에게, 네가 마시고 있는 물이 좋은 물인지 안 좋은 물인지 묻고 있는 것이니. 기존의 물을 마시고 살아온 물고기가 기존의 물 자체를 성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다른’ 물, ‘새로운’ 물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기존에 마시고 있는 물이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물인지, 아니면 오염된 물인지, 오염되었다면 어디가 오염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성찰을 통해 형성된 교육은 다시 교육 문화를 바꾸게 된다. 결국 문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교육을 상상하고, 그 교육적 상상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그만큼 더 다양한 교육 문화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교육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범벅이 되면서, 더 나은 교육적 삶도 가능해진다.

시청자 의견 중에서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라는 글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답답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의 틈새를 발견하였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한다면, 더 나은 교육을 제시한다면, 오랫동안 굳어온 교육 문화도 바뀔 수 있다. 결국 문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9. 연구에 대한 연구(硏究)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는 ‘연구’가 나 자신에 대한 기술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내내,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동시에 돌아보아야 했다. 어느 순간 생각이 가는 대로 저만치 나아가다가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내가 나아갔던 발자취를 꼼꼼히 점검해 보는 것. 마치 달팽이가 온 몸을 쭉 폈다가 다시 움츠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듯, 나의 연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특히 ‘교육의 눈으로 교육 문화 보기’를 쓸 때, 나는 내 생각을 쓰고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려놓은 ‘나’를 다시 객관화해서 보면서, ‘나’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보고서를 쓰면서 용어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현상, 기술, 분석, 해석, 문화 주제, ……. 질적 연구를 둘러싼 많은 용어들은 하나하나에 대해 논문 하나씩 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연구 속에서 그 용어들을 ‘내 방식대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정의내리지도 못한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결국, 나는 일상 용어를 빌려서 내 언어를 만들어 썼다. 최대한 적합한 단어를 찾으려고 사전도 뒤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표현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이것으로 완결이지만,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교육은 행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과정이니까.

< 자료 1 ―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채원이네)’ 관찰지 >

① ‘채원이가 욕을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채원이와 놀아주지 못하고 채원이가 언제나 놀이터에서 놀면서 어른들에게 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문가는 ‘도덕 관념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주 어릴 때는 야단맞으면 나쁜 것으로, 야단맞지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즉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전문가는 처음에 채원이의 욕 보다는, 채원이의 생활 전반에 대해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규칙적 생활 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채원이가 자신에게 맞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도록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채원이와 좀 더 놀아주라, 채원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라는 등의 제안이 바로 그것이다.

 

③ 채원이에게 ‘걸맞는’ 놀이감을 사 주러 갔다. 놀이는 단지 노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감정과 사고가 발달한다는 전문가의 말. 특히 놀이를 통해 공격적 마음을 표현하게 해 줄 수 있다.

 

④ 채원이에 대한 훈육 방법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눈을 맞추고, 내용은 엄하게, 간결하게”라는 전문가의 멘트. 채원이 엄마가 채원이를 훈육할 때, 우선 구석에 데려가서 “엄마 봐. 그러지 마. 뚝.”와 같은 식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프로그램에서 “팔을 잡고 / 눈을 맞추고”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훈육 후에 따뜻한 위로를”이라는 멘트와 함께 엄마가 채원이를 달래준다. 훈육 내내 채원이는 울면서 엄마의 시선을 피한다.

 

⑤ 아버지와 채원이의 정서적․신체적 상호작용을 격려한다.

 

⑥ 채원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한다. 마치 옛 어른들이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에게 회초리를 스스로 가져오게 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의자에 앉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또 아이가 자신이 왜 야단맞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즉 훈육이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부모 역시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⑦ 전문가가 채원이의 스티커를 가지고 있자, “만지지 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채원이는 침대에 누워서 스티커를 가지고 뒹군다. 엄마가 와서 “채원이 일어나서 해. 일어나서 안할거야? 안할거면 엄마 줘.”라고 말한다. 채원이는 스티커를 껴안고 있다가, “안할거야.”라면서 던진다. 그리고 엄마는 “제자리에 갖다 놔.”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채원이가 말을 듣지 않자 스티커를 뺏어서 가져간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부짖는다. 엄마가 와서 “뚝! 또 악쓴다, 뚝!”하니까 채원이는 울면서 “버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채원이가 스티커를 제자리에 갖다놓지 않았다고 야단을 친다. “또 이러면 엄마 이거 버려버린다~! 알았어? 대답해.” 그러자 채원이는 엄마를 외면하고 침대에서 돌아앉는다. “엄마 안봐?! 알았어. 나도 너 안봐.”하고 엄마가 가버리자, 채원이는 조금 앉아 있다가 엄마를 흘겨보며 욕을 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훈육이 시작된다. 전문가가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채원이의 팔을 잡자, 채원이는 “놔~. 아프단 말이야!”라고 소리친다. 채원이는 전문가에게 욕을 하고, 전문가는 “욕 하면 안돼.”라고 말하며 채원이와 대결하고, 채원이는 울어버린다. 채원이는 울면서 전문가에게 계속 욕을 하고, 전문가는 채원이의 팔을 꼭 잡고 “어떻게 하면 놔준다 그랬지?”라고 계속 말한다. 그리고 “선생님과 채원이의 힘겨루기”라는 자막이 뜬다. 채원이의 욕은 계속되고, 전문가 역시 팔을 잡은 채로 “뚝! 어허~그만! 뚝!”을 반복한다. 여기서 “일관된 선생님의 태도”라는 자막이 나온다. 채원이가 계속 울부짖으며 욕하고, 선생님은 계속 “그만”만 말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진다. “욕해도, 안 통해.”라고 말하는 전문가. 결국 채원이는 울기에 지쳐서 안달하다가 점점 울음을 그친다. “점차 누그러지는 채원”이라는 자막이 나오지만, 채원이의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있는 듯 하다(그림 1). 채원이의 울음이 잦아들자 엄마가 채원이 앞에 앉아서 “잘못했어 안했어.”라고 다그치고, 채원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훈계를 좀 더 하다가 안아준다. 잔잔한 배경음악 흐른다.

 

⑧ 채원이가 욕 했을 때의 할머니의 약한 대응에 대해, “할머니, 따끔하게 혼 내신 거 맞나요?”라는 멘트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문가의 훈육 방법. 훈육할 때는 그 즉시, 정면으로 눈을 맞추고, “부드럽지만 부모로서의 위엄을 가진 눈빛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 후 아이에게 그 행동이 명확히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알려주어야 한다.

 

⑨ 채원이가 모래를 뿌리자, 할머니가 채원이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큰 소리로 나무라면서 엉덩이에 체벌을 가한다. 채원이는 할머니를 외면하며 딴청을 피운다. 할머니가 계속 체벌하면서 “또 그렇게 할거야!”라고 크게 나무라자, 채원이는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요”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채원이. 그리고 “채원, 비로소 잘못을 깨달은 듯”이라는 자막이 나간다. 할머니는 꾸중을 마치면서 채원이를 안아준다. 그러나 채원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채원이가 할머니의 심정을 알아줄까요?”라는 멘트가 나간다.

 

⑩ 채원이가 잘못하고 엄마가 “어떻게 할까?!”라고 하자, 채원이는 “의자에 앉히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는 “채원이 가서 앉어. 채원이 뭐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앉아 있어.”라고 말한다. 결국 채원이는 울면서 의자에 앉혀지고, 앉자 마자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손 가만히!” “채원이 반성할 때까지 엄마가 얘기 안할거야.”라고 말하며 채원이를 훈육한다. 다른 가족들도 냉담하다. 엄마는 엄격하게 훈육을 마친 다음, 채원이를 안아준다.

 

⑪ 채원이가 이번에는 엄마에게 직접 욕을 했다. 엄마는 채원이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못했어 잘했어.”라고 다그친다. 채원이는 울먹이며 곧바로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잘못했으면, 반성해. 반성 다 하구, 나중에 엄마 불러.”라고 말하고는 채원이를 의자에 앉혀두고 가버린다. 채원이는 “엄마 잘못했습니다~”라고 크게 울지만, 가족들은 하나같이 냉담하다. 채원이가 일어서자 엄마는 다시 와서 채원이를 앉으라고 꾸중하고 간다. 채원이는 할머니에 이어 아빠까지 찾아보지만, 가족들은 “아빠 왜 찾어 원이가 잘못했는데”와 같이 계속 단호하고 무뚝뚝하게 꾸짖는다. 채원이는 분위기에 질린 듯 계속 울부짖는다. 아빠가 나와서 채원이를 다시 앉게 하고는, 채원이의 잘못을 묻는다. 그리고 채원이는 울먹이면서 잘못한 것을 말한다. 채원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마지막에 엄마가 다가와서 좀 부드럽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한 뒤에 안아준다. 할머니들도 차례로 채원이를 안아주고,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채원이의 욕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 자료 2 ― 흐름 ①의 글 중에서 ‘때려야 하는 이유’ 부분만 발췌한 자료 >

무조건 두들겨 패야 됩니다.. 매 밖에 없어요..

욕하면 나쁘다는것을,, 함부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뼈속깊이 기억하게 하고싶네요.

어느정도 매를 때려서 그 아이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야죠.

때린다고 모든게 다 해결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선에서죠.

엄한 부모밑에 효자 있는 법입니다. 오냐오냐 키운 자식이 겨오르는 법입니다. 떼쓰는애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니까 밥만 잘먹습디다.

갈구세요.. 구타도 좀하고.. 애가 개념이없잖아요.. 군대갔다왓죠? 그대로 하세요.. 좀 맞다보면 개념이 생기거든요.. 우리집개도 잘못햇을때 때리면 다신안그러거든요..

조선시대때 애가르키는거 보면 패는것도 싱거운거 입니다

그 놈도 오냐오냐 한대도 안맞고 자란 놈... 어른이 다 된 지금 보고 있노라면 아주 개싸가집니다. (중략) 하여간 그 자식도 앞날이 참 걱정됨. 그런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한 체벌도 하세요!!!! 엉덩이 몇 번때린다고 애 안죽습니다=_=

뭐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 하던가......

애는 맞고 자라는 것 입니다. 인간도 동물이구요.

정말 존경스럽다....예전엔 글케 무섭고 싫었었는데.... 자식농산 진짜 바로앞을보고 하는게아니라 10여년 뒤를 보고 아니 20여년뒤를보고 해야한다는걸..

그런애들은 따끔히 혼내야 한다. 나도 4살때 때 엄청쓰다가. 아빠한테 엄청 큰매로 맞았다. 그후로 난 때써본적이 없다. 나는 그 기억이 뚜렷하다. 채원이한테 매를 드는게 좋을듯. 말로만 말고. 욕을할려고 하면 맞은기억을 절때 잊지 못한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따끔하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가르쳐줘야 해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줘야 한다는 겁니다.

분명 할머니가 혼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여 그러는 것이니 앞으로 할머니도 매를 드셔야 합니다.

이쁜 자식 매한대 더 때린다고... 잘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야단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심한말을 했을땐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세우는것도 괜찮은 방법같은데 너무 방관하시는게 아닌가 싶어요.

타고난 인성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문제는 티비로 본 그애의 타고난인성에 걱정이 될뿐이다

기가너무 쎄서 기를조금 조절해야해요. 결론은 좀맞아야 될것같네요,,

(중략) 채원이 부모에게 고합니다. 당장 매를드세요 패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패라는 말이아니라 싸리나무 회초리를 100개만준비하시고 채원이가 욕하고 다른아이에게 해코지 할때마다 종아리를 피가나도록치세요 그래도 안고쳐지면 회초리를 점점굵은것으로 바꾸어주시고요 옛날 우리조상님의 지혜로운 교육법을 실천하세요 그러면 채원이는 착하고 이뿐아이로 자랄수 있습니다

어른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오냐 오냐 하시지 마시고 사랑의 매를 가져다 손바닥 또는 종아리 욕하면 3대 한번 더하면 4대 이런식으로 단호하고 따끔하게 사랑의 매를 대세요. 마음 아프실지 모르지만 지금이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학교에라도 가게 되면 고치기 더 힘듭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과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 애정을 쏟으셔야합니다. 하지만 잘못된행동과 막무가내 떼쓰기를 할때는 지금보이는 정도의 꾸중으로는 개선되지않습니다.

참..-_- 보는 내내 회초리 생각 밖에 안났습니다 조용히 엄마가 방에 데려가 아이의 잘못을 말한 후 엄하게 10대만 치고 아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악을 쓸것이 아닙니까? 채원이 같은경우는 안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하다고 손으로 빌면서 무릎꿇고 빕니다.

그러고 나서 토닥토닥 한번 해주면 맞고나서의 그 감동이란!!! - -! (중략) 저는 잘못했을때 맞고 컸는데 ㅠ

그냥 욕한번하면 때리는게 최고입니다 무슨 별 요상한 방법 다써도 때리는거보다 좋은거 없습니다 욕한번할때마다 한대씩 때리다가 안고쳐지면 2대 3대 때려요 때려 다 맞으면서 컸구만

저도 아빠가 하도 무섭게 상식밖으로 때려서 저도 아빠에 대한 기억은 맞은 기억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님이 오늘 채원이 나온거 보셨다면 그 생각이 달라지실겁니다. 채원이같은 애는 타이른다고 되는거 아니거든요. 차라리 종아리든 엉덩이든 때리는 훈육이 필요해요.

(중략) 매를 안들어서 우습게 보고 영악해지는거거든요. 매를 안들고는 누구도 고칠수가 없어요. 다만.. 자주 때리면 님 글 내용처럼 무서워하니까 적당한 체벌은 있어야 합니다. 글구 자식이 부모를 무서워해야죠.

암튼 그래서 어느날 또 그러길래 제가 방에 가둬 놓고 진짜 막 때려줬어요 그러면 더 역효과 난다고 애들은 절대 때리면 안된다지만 전 솔직히 그때 참다 참다 정말 많이 때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 되었단건 아니지만 그후로 우리 아이 욕 절대 안합니다 아이가 왜 맞는지.그리고 욕을 왜 하면 안되는지.. 솔직히 채원이 정도의 아이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꺼 같아요.ㅡㅡ

체벌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사랑의 매는 성인이 되었을때 거름이 되지 않나 싶네요....

솔직히 좀 맞으면서 큰다고해서 그게 아이에게 어떠한 정신적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청 맞으면서 컸잖아요? 개인적으론 그게 저에게 성장과정에서 나쁜영향을 준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가끔 제게 너무 나쁜 습관이 발견되거나 할때, 우리 엄마 아빠.. 그때 나를 방에 가둬놓고 마구마구 패서라도 공부 좀 독하게 시키고 이런 버릇은 좀 고쳐주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던데..-_-a 필요할땐 채원이도 좀 맞아야해요.

두려움이 없는 아이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략) 죽지않을 정도로 패시기 바랍니다. 말로 안될때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태를 알게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의 위협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 아이는 조금 마음이 움직일 정도의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과 교육으로 가르치십시요. 그 아이가 세상에 두려움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교육이 될 것입니다.

제가 봤을때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답한것 같아요.. (중략) 이경우엔 적절한 ...사랑의 매 필요하다 봅니다...

최선책은 회초리라고 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식을 키웠던 방식이 바로 회초리 아닙니까? 아무리 채원이에게 하지마라 하지마라 해도 4살밖에 안된 아이가 말 한마디에 고쳐지겠습니까? 정 안되면 정말 회초리를 드십시요.

채원이를 보면 어른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있어보이는데, 회초리로 어른의 위엄을 보여주세요. 채원이가 할머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정말 보면서 화가나더군요. 할머니께서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려야 될듯 싶지 않나 생각합니다. (중략)

제가 커서 자식을 낳았을때 채원이의 경우라면, 전 욕하면 하는대로 입을 때려줄 겁니다. 나쁜 욕 내 뱉는 입은 쓸모없는 입이라며 입을 때려주고, 엄하게 다스려도 안되면 회초리를 들겠습니다.

약간의 매는아이에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렸을쩍 심하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엄마께서 일정한 장소로 데려가 지정된 회초리를 가져 오라고 하시구 몇대 맞아야지 괜찮을껏 같냐구 물어보십니다. 왜 잘못을 해서 맞아야 하는지도 물어보시구요. 그방법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때부터 엄마 말은 정말 잘들었구요 커서도 엄마말은 거역한 적이 한번두 없습니다..

아버지의 체벌을 엄마보다 좀더 두려운 상대여서 저도 한번 아버지가 화내시면 무서운 존재라는걸 알기에 아버지가 싫어하실만한 나쁜짓은 절대로 안합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체벌한적은 어렷을떄 딱 한번 밖에 없는데 어렷을쩍 충격이 아직까지도 가는것 같네여;; ㅎ

그만큼 적당한 체벌은 아이들 에게 좋다고 느껴집니다

그건 부모가 자제력을 잃고 폭력을 쓰는게 아니라 아이가 어려서 말로 설명만 해가지고서는 의사소통이 안되니까 그나이에 옳고 그름을 분간할수있게 알려주는 한가지 수단입니다.

우리가 어릴때 불에 손을 데고나면 불이 뜨겁고 위험한 것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처럼..욕을했을때 아픔을 느껴서 아..욕하면 아프구나 하지말아야지를 스스로 알수있다면 나쁘 버릇이 고처지겠지요. 그런식으로 고치면 뭐하냐고 하는분이 계신다면..우리도 어릴때 불은 뜨거운거야 라고 듣기만 했을때 그걸 알았습니까? 그 나이에는 정말 데어봐야 알수있는겁니다. 아직 그 수준인 거지요. 그 다음에 머리로 (데는 경험을 한적이 없더라도) 불이 위험하다는걸 감지할수있는나이가 지금 채원이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자기가 쓰는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말인지... 그러한 행동들을 고쳐주는건데 뭐가 나쁩니까??

< 자료 3 ― 내가 생각하는 교육 (2005년 12월 12일 수정) >

 

“너는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에 대해 명제적으로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워낙 추상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활용되기 때문에, “교육이란 이런거야!”라고 먼저 외연을 긋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꾸로, 제가 지금까지 (짧은 삶이지만) 살아오면서 느꼈던 ‘교육’, 혹은 ‘교육 아닌 것’들을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해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지, 변죽이라도 한번 울려볼까 합니다.

 

 

1. 내가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

 

저는 대학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학년 때까지 저는 엄청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김진명씨 소설에 감격해 마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무언가 엄청난 사명감을 느끼는, 국민교육헌장을 매우 잘 훈육받아온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1학년 가을, 한 좌파(?;) 선본에서 선거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파 선본을 하면서도 꿋꿋이 민족주의 선본을 찍을만큼, 당시에는 신념이 확고했지요^^;

그런데 한 선배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베트남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국의 침략 지원 전쟁, 그것도 돈과 권력을 위한. 만약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냐는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광인 일본놈들 따위야 천벌 받아도 싸다고 생각하던 제가 처음으로 ‘내가 평범한 일본인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공산당 선언」을 읽고, 겨울에 철거촌 현장활동을 가면서 저는 책에서 읽은 모순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의 혁명적 전환’이었지요.

저는 이것이 저에게 가장 깊은 교육적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 그리고 현실과 맞닿아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 그 두 가지 원리가 결합될 때, 가장 큰 교육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갑자기 웬 식상한 얘기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의 가치관과 정서의 50%는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저에게 ‘감동’을 준 책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저에게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계 안에서 또한 체험하고, 느끼고, 교육받습니다.

물론 책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는 것은, 제가 구성하고 있는 세계와 책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의 만남입니다. 그 접점에서, 저와 책이 소통할 때, 저는 성장하고 교육받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제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혹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책 속에서 만날 때, 저는 책이 제 안에 흡수되고, 저 또한 그만큼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세 번째로 제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험은, 세미나입니다. 문학 세미나, 교육 세미나, 사회과학 세미나 등 대학에서 참 많은 세미나와 토론을 겪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경험이 교육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토론의 경험들이 저의 생각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특히 문학 세미나는 단지 쟁점과 이론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경험을 공감(共感)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앞에서 든 경험 외에도 무수한 교육적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 얘기하다가는 글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또 그 경험들은 대부분 위의 세 경험과 비슷하게 묶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내가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저는 교육이라고 느꼈던 것보다 교육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이 더 많습니다. 비평준화 사립 지방 남자 고등학교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입시․폭력․훈육의 화려한 앙상블이 자행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저런 선생님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사범대에 지원했으니까요.

그 중에서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특히 이 경험은 저도 처음에는 교육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교육이 아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라 저에게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읽으셨겠죠?^^;(안읽으셨다고 지금 읽지는 마세요. 그닥 좋지 않은, 위험한 책입니다-_-) 거기서 새로 부임한 교사가 엄석대의 전횡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대를 체벌하고, 학생들도 다같이 맞는 장면이 나오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책으로 읽었을 때는, 정말 좋은 교육이다, 멋진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열린교실 학생들에게 수업 자료로 사용하면서, 비디오로 다시 한번 보았지요. 그런데 같은 장면이, 비디오에서 시청각적 이미지로 재생되니까 갑자기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더라구요. 제가 깨닫지 못하는 어떤 공포의 기억을, 제 몸은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그게 중학교 1학년 때 단체 기합 받으면서 맞았던 기억이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교육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육에서 필요악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악은 악을 이용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이루겠다는 것인데, 교육은 그 과정에서 악을 이용하는 순간 이미 교육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 때문에 제 연구 주제가 훈육과 체벌에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교육인지 아닌지 스스로 모호했던 것

 

마지막으로 이것을 교육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말 고민되었던, 난감했던 상황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독서 지도 과외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책에 너무 흥미가 없어서 결국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으로 시작했는데, 아이는 그 만화 속에서 폭력과 전쟁의 매력을 발견하더군요-_-;; 오래 토론했지만, 결국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내용은 우선 빼고 과정만 놓고 본다면, 제가 앞에서 교육이라고 주장한 ‘책읽기’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장의 방향성을 떠나, 아이 또한 교육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판단하기에 그릇된 방향으로의 변화이므로, 그것은 교육이 아닌 것일까요?

 

 

4.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속성

 

앞에서 쓴 제 경험을 다시 읽어보고, 제가 생각하는 교육의 성격을 간단히 적어보았습니다.

 

- 교육은 삶을 보는 눈의 변화․확장이다.

- 동시에, 교육은 삶에 대한 태도와, 삶을 살아가는 실천 방식의 변화이자 표출이다.

- 교육은 만남(상호작용,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특히 이성적 소통 뿐만 아니라, 마음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감(共感)도 중요한 교육이다.

- 교육의 주체는 대부분 사람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 이외의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도 일어난다(책읽기가 대표적인 예이며,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 혼자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교육이 일어나기도 한다).

 

- 교육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교육은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교육은 단지 정신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결과는 몸에 새겨진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첨언하겠습니다. 특히 비폭력주의나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같은 경우, 단지 사상의 변화로는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도리어 신체의 변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신체, 감수성, 민감해지기, 공감하고 유대하기 등이 교육의 구체적인 요소들입니다.

 

- 교육은 분명히,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획일적(교육은 이런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이 방향이 아니면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도 않다?!

 

 

 

 

글을 쓰고 나니 한편 정리되면서도, 또한편 헷갈리는군요. 특히 여기서 제가 ‘교육’의 외연을 정확하게 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교육의 외연을 정확히 그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예를 들어 치료―교육―사회적 개혁은 분명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변화를 모색할 때, 우리는 이 세 영역을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의 외연에 얽매여서 현실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되겠지요(실제로 교육자라는 사람들이, ‘이건 사회적 문제니까 나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결국,

다시 누군가 저에게 “교육이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덧붙이는 단상>

 

교육은 교육의 결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으로써 규정된다.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어떤 힘으로 될 것인가’가 중요.

 

현실적 맥락․배치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충돌하여,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감수성과 신체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관점의 변화가 돈오(頓悟)라면, 감수성의 변화는 점수(漸修)이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그 느낌이 신체를 변화시킨다.

그 과정 전반에 ‘기존의 나’와 ‘변화한 나’ 사이의 긴장이 일어난다. 그 긴장 사이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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