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9.26. 지음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국어교육과 홍수봉

  혹시나 비가 오지 않으려나 조마조마 했다.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목 길게 빼서 골목길을 확인했다. 다행히 환한 햇빛을 받고 있다. 작년에 열린교실 기간 내내 비가 왔다갔다 해서 야외수업 한번 제대로 못한 게 서운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한다. 대학 강의에는 9시 수업에도 종종 지각하는 나이지만, 중학생들 앞에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서야 하는 일주일만은 8시 등교도 시간 정확히 맞춰서 가야한다. 아이들은 절대로 지각하지 않는다.

입학식장이 좁은 실내라서 붐볐다. 학생들 자리 잡아 앉히랴, 모둠 선생님들 빨리 오라고 연락하랴, 게다가 입학식 사회자까지 맡은 나였기에 정신없이 식장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시작인데, 또 늦겠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나를 향해 “선생님!!”이라고 외쳤다.

아직 학생들 모둠 선택도 안했는데 누가 나를? 그렇게 돌아본 내 눈에, 큰 키에 까무잡잡한 한 아이가 보였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또 국어 모둠 들어가려고 왔어요!!!”

한민이였다.

작년에 처음으로 열린교실 교사가 되었을 때, 딱 세 명의 아이들이 국어 모둠을 선택했다. 그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선생님들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가끔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 오빠로 불러서 애정 어린 주의를 받곤 했던 중학교 2학년 여학생. 한민이는 1년 전 그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심지어 옷차림까지 똑같았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바빠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기뻤다. 학 학생과 두 번째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감동을 준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신없이 입학식이 끝나고, 오후부터 모둠별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사범대로 올라가는 길에 한민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1년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 지난번에 함께 했다가 이번에는 같이 못하게 된 선생님들 얘기, 한민이 학교 얘기,…….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진학 얘기가 나왔다.

“너희는 평준화지? 좋겠다. 나는 중학교 때도 야자 했는데……. 넌 어느 계열로 가고 싶어? 인문계 아니면 자연계?”

“선생님, 전 실업계 가고 싶은데요.”

“…… 응?”

“대학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빨리 취직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일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아…그래……?”

말꼬리를 슬그머니 흐렸다. 그렇게 얼버무리는 동안, 내 생각은 5년 전 다녔던 XX 중학교 3학년 8반, 어느 가을의 종례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성적이 이것밖에 안되는데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겠다고? 넌 절대로 합격 못해!

― 정 니 뜻이 그렇다면, 고등학교 떨어지더라도 선생님은 아무 책임 없이 전적으로 네 책임이며, 재수도 하지 않고 실업계로 진학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그렇지 않으면 원서 도장은 없다.

― 오늘 숙제 안해온 사람 청소한다. 누구지? 어, 반장도 안 해왔어? 웬일이니 니가? 그럼…… 어이, 실업계 가는 놈들 일어나. 오늘 청소는 너희들이다.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실업계’라는 이름은 인간적 낙오를 의미했다. 실업계에 가는 내 친구들은 선생님께도 ‘인간 취급’을 받지 않았다. 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 취급’을 받기 위해서 악을 쓰고 공부를 했고,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울대로 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한 학생이 “실업계가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업계를 가면 네가 나중에 살아가는 데 제약이 너무 많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못할 수도 있다, 대학을 나오는 게 네 꿈을 이루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조차도 뜻을 잘 모르고 있는 말들을 그냥 내뱉어 놓았다.

한민이는 가만히 듣더니, 한마디를 했다.

“사람들은 왜 대학을 가지 않으면 틀린 길을 걷는다고 말할까요? 그냥 제가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길을 걷는 거라고 말해줄 수는 없나요?”

그날 나는 한민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시간은 동시에, 다르게 흘러간다. 내가 시간 속에서 무언가에 매진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것을 다 이루어놓고 잠시 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시간은 매우 빨리 흘러있다. 그리고 열린교실도 ‘매우 빨리’ 끝났다.

 

졸업식 끝나고 학생들과 팥빙수를 먹으러 갔었다. 일주일간 함께 했던 기억들을 팥빙수 하나에 녹여 먹으면서, 나와 한민이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억을 먹어두려고 숟가락 싸움을 했었다. 그렇게 몸 속에 담아둔 기억들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든다. 컴퓨터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2002 열린교실 주소록]과 함께.

거의 반 년 만에 듣는 목소리. 그동안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소심함을 미안하다는 몇 마디로 풀어내면서, 넌지시 고등학교에 대해 묻는다. 학교요? 그저 그래요. 예전보다는 바쁘구요. 아, 그냥… 인문계 갔어요.

덜컹. 잠시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 잘 지내구. 조금 더 이야기하다가, 딸깍.

갑자기 답답해진다. 가슴 속에, 아니 온 몸 속에 한 가지 문장만이 가득 찬다.

‘내가 만약 그 때 한민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줬다면?’

어쩌면 한민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업계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민이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빨리 찾아서,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이 교과서 속에 들어있는 조그만 세계보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도구들을 만지면서 더 큰 세계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민이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학생들이 미처 펴지 못한 꿈을, 조금 더 쉽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님이다. 아직 미숙한 솜씨로 밑그림만 대강 그려져 있는 학생들의 손에, 다채로운 물감들을 쥐어주고 학생이 빈 캔버스를 아름답게 그려넣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선생님이다. 차가운 겨울 땅 밑에서 겨우겨우 움트기 시작하는 여린 씨앗을 위해, 그 씨앗이 품고 있는 미래의 열매를 위해 손수 호미를 들고 언 땅을 녹여주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으로서 실격이었다.

도리어 나는 한민이에게 배운 것이다. 한민이는 나에게, 선생님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기간이 일주일 늦어졌다. 작년같으면 딱 장마철인데, 이번에는 그건 피했다. 대신, 찌는 듯한 한여름이다.

이번에는 내가 열린교실 지기를 맡다 보니, 국어 모둠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대형 강의실이 학생들 이야기 소리로 가득 울린다. 이제 또 일주일 시작이군. 그 때, 누군가 나를 향해 말을 건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이번엔 아예 모둠 교사도 아닌데, 누가 또 부르는 거지? 돌아보니, 작년에 국어 모둠에서 같이 했던 재훈이다. 약간 마르고, 안경을 쓰던 모습은 그대로인데,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듯 하다. 하긴, 이제 3학년이니까.

언제나 그렇듯 정신없는 입학식을 마치고, 점심은 그냥 국어 모둠에 끼어서 먹기로 했다. 사범대 뜰 안에 앉아서 냉면을 기다리는 동안, 재훈이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고등학교 말인데요… 엄마 아빠가 자꾸 외고 가라고 그래요. 나는 외국어는 별로 자신 없는데… 거기가 좋다고 자꾸 가라고 하시네요.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

그리고, 나는 재훈이에게 되물었다.

“음… 그보다 먼저, 니가 하고 싶은 건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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