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지금까지 걸어온 자취가
가장 아름다운 지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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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토고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들썩이고 있다. 요즘 뜨는 광고 속 노래로 비유하자면 딱 "한국은 월드컵을 좋아해"란 말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여하튼 스스로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러나 한 쪽에선 월드컵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생계를 잃을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월드컵이 전혀 반갑지 않다. 이들이 월드컵을 싫어한다고 마찬가지로 이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오마이뉴스>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월드컵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늘을 살펴봤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김연기 기자] 상암동 철거민 출신인 김상민(가명·36)씨. 김씨는 지난 99년 자신이 살던 곳이 월드컵구장 건설을 위해 철거된 이후 7년 여를 떠돌다 최근 여수에 정착했다. 7년 가까이 벌여 온 철거투쟁을 최근에서야 접고 새 삶을 찾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20대 후반에서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철거투쟁으로 보냈다. 그를 이처럼 힘든 길로 이끈 건 다름아닌 월드컵때문이었다. 당시 김씨와 함께 상암 2공구에 살던 40세대는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2006년 어김없이 월드컵이 다시 찾아왔다.
김씨는 지금도 국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국가는 월드컵을 이유로 김씨에게서 삶의 터전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애국'이란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친 월드컵 응원 인파들을 보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국가, 애국이란 틀 속에서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아요. 난 국가로부터 당한 게 너무 많은데. 이런 마음은 꼭 상암동 철거민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은 모든 소외된 이들도 똑같을 거예요."
김씨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예정지인 대추리 주민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리 국익이 최우선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일부 주민들의 권익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20년 전 전두환식 방식과 다른 게 뭐가 있나요? 개발독재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 있어요."

"월드컵 기다려지지만 한국경기는 안 볼 거예요"

물론 김씨도 월드컵이 기다려진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기는 보지 않을 작정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교도소에서 신문을 통해 월드컵 소식을 접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이는 수많은 인파들을 보면서 더 가슴이 아팠다. 3년 넘게 그곳에서 침낭에 의지해 1인 시위를 벌였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김씨는 7년에 가까운 철거투쟁 기간 동안 4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만도 4년이 넘는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뒤인 지난해 5월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나왔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난 뒤 2번째 출소를 했을 때였죠. 다시 시청앞 광장에서 1인 시위를 이어 갔어요. 당시 이명박씨가 막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였을 거예요. 어쩜 그리 시청앞 행사가 많던 지. 일주일이 멀다하고 무대 꾸미고 이명박 시장이 나와서 연설하고. 그토록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한 번도 들어주지 않은 그네들이었죠. 한쪽 구석에 처박혀 그 모습을 보면서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됐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 시청앞 광장이 지금은 한 대기업의 손에 들어갔다. 방송사와 신문사 등이 섞여 있는 SKT컨소시엄은 월드컵 기간 내내 하루 500여 만원을 주고 그곳에 대한 사용권을 독점했다.

거리응원 교묘하게 이용하는 기업·국가가 더 나빠

"거리응원 자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 역시 그들만의 자유이니까. 다만 이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기업과 국가가 못마땅한 거죠. 한 쪽에선 생존권을 외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내몰면서 다른 한쪽에선 월드컵을 무기로 시민들을 자기들 손아귀 아래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는 셈이죠. 이게 대한민국입니다."
김씨는 지난해 말 이후 상암동 철거투쟁을 사실상 접었다. 그리고 올해 3월 김씨는 서울시청을 다시 찾았다. 지난 2002년 초 시가 김씨에게 제시한 보상안을 지금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는 김씨에게 5년 만기 임대아파트를 보상안으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시는 "다 지난 일"이라는 답변만을 김씨에게 내놓았다. 월드컵도 끝나고 더 이상 김씨가 거추장스럽지 않은 마당에 김씨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던 것.
김씨는 결국 그 길로 서울 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철거투쟁에 바치고, 남은 건 맨몸뚱이 하나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지금 김씨에게는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그러다보니 여수까지 내려왔다. 여수에는 공단도 많으니 무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나 싶어서 였다.
"남들은 제가 철거투쟁을 하면서 보낸 시기가 인생에 羚?가장 중요한 때라고 하는데, 난 그 기간을 전부 싸움에 바쳤지만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이쯤에서 투쟁을 접고 또 다시 생계를 찾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죠."
하지만 서울에선 취직이 힘들었다. 7년에 가까운 철거투쟁과 4번의 구속 전력은 그에게서 밥벌이조차 막아 세웠다. 김씨는 취직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해 인터뷰 중 사진촬영과 실명 공개를 거부했다.
월드컵 개막을 눈앞에 둔 현재 김씨는 여수의 한 조선소에 입사원서를 넣고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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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토고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들썩이고 있다. 요즘 뜨는 광고 속 노래로 비유하자면 딱 "한국은 월드컵을 좋아해"란 말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여하튼 스스로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러나 한 쪽에선 월드컵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생계를 잃을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월드컵이 전혀 반갑지 않다. 이들이 월드컵을 싫어한다고 마찬가지로 이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오마이뉴스>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월드컵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늘을 살펴봤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김연기 기자]
▲ 지난 1997년 정부는 상암동 일대를 택지개발 구역으로 지정하고 이곳에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했다. ⓒ2006 이권재·박수원
ⓒ2006 이권재·박수원

상암동 철거민 출신인 김상민(가명·36)씨. 김씨는 지난 99년 자신이 살던 곳이 월드컵구장 건설을 위해 철거된 이후 7년 여를 떠돌다 최근 여수에 정착했다. 7년 가까이 벌여 온 철거투쟁을 최근에서야 접고 새 삶을 찾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20대 후반에서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철거투쟁으로 보냈다. 그를 이처럼 힘든 길로 이끈 건 다름아닌 월드컵때문이었다. 당시 김씨와 함께 상암 2공구에 살던 40세대는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2006년 어김없이 월드컵이 다시 찾아왔다.

김씨는 지금도 국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국가는 월드컵을 이유로 김씨에게서 삶의 터전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애국'이란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친 월드컵 응원 인파들을 보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국가, 애국이란 틀 속에서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아요. 난 국가로부터 당한 게 너무 많은데. 이런 마음은 꼭 상암동 철거민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은 모든 소외된 이들도 똑같을 거예요."

김씨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예정지인 대추리 주민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리 국익이 최우선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일부 주민들의 권익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20년 전 전두환식 방식과 다른 게 뭐가 있나요? 개발독재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 있어요."

"월드컵 기다려지지만 한국경기는 안 볼 거예요"

물론 김씨도 월드컵이 기다려진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기는 보지 않을 작정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교도소에서 신문을 통해 월드컵 소식을 접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이는 수많은 인파들을 보면서 더 가슴이 아팠다. 3년 넘게 그곳에서 침낭에 의지해 1인 시위를 벌였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김씨는 7년에 가까운 철거투쟁 기간 동안 4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만도 4년이 넘는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뒤인 지난해 5월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나왔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난 뒤 2번째 출소를 했을 때였죠. 다시 시청앞 광장에서 1인 시위를 이어 갔어요. 당시 이명박씨가 막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였을 거예요. 어쩜 그리 시청앞 행사가 많던 지. 일주일이 멀다하고 무대 꾸미고 이명박 시장이 나와서 연설하고. 그토록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한 번도 들어주지 않은 그네들이었죠. 한쪽 구석에 처박혀 그 모습을 보면서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됐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 시청앞 광장이 지금은 한 대기업의 손에 들어갔다. 방송사와 신문사 등이 섞여 있는 SKT컨소시엄은 월드컵 기간 내내 하루 500여 만원을 주고 그곳에 대한 사용권을 독점했다.

거리응원 교묘하게 이용하는 기업·국가가 더 나빠

"거리응원 자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 역시 그들만의 자유이니까. 다만 이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기업과 국가가 못마땅한 거죠. 한 쪽에선 생존권을 외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내몰면서 다른 한쪽에선 월드컵을 무기로 시민들을 자기들 손아귀 아래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는 셈이죠. 이게 대한민국입니다."

김씨는 지난해 말 이후 상암동 철거투쟁을 사실상 접었다. 그리고 올해 3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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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달면 체중은 무거워지지만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다.”


                                                                                               (전략)

눈을 감아야만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을 뜨고도 꿈꿀 수 있다. 찰스 핸디는 낮에 꿈꾸는 사람들에게 주목했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낮에도 꿈을 꿔. 이런 사람들은 아주 위험하지. 자신의 꿈을 반드시 이뤄내고 마니까 말이야.”

낮에 꿈꾸며 책을 읽어라. 책 읽는 비전가, Reading Visionary는 꿈을 현실로 이뤄낸다. 원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어라. 그리고, 체 게바라의 말을 가슴에 새겨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흔히, 미래는 장밋빛으로 그려지기 쉽다. 미래를 결정하는 변수들을 무조건 좋은 쪽으로 설정해서는 곤란하다. 비전가는 현실을 염두에 둔 현명한 전략을 세운다. “올바른 전략이란 경쟁 업체가 당신보다 뛰어나거나 적어도 당신만큼 유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 만큼이거나 그 이상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때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도 적게 행동하고, 적게 행동하면서도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비전가가 아니라 몽상가들이다. 존 맥스웰은 비전가와 몽상가의 행동 특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전가는 말은 적고 행동은 많이 한다.

반면, 몽상가는 말은 많으나 행동은 적다.

비전가는 자기 내면의 확신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반면, 몽상가는 외부 환경에서 힘을 찾는다.

비전가는 문제가 생겨도 계속 전진한다.

반면, 몽상가는 가는 길이 힘들면 그만 둔다.”


우리 모두 비전가를 소망하자. 비전을 품고, 체 게바라의 멋진 말을 가슴에 새기고 난 다음에는 책을 읽자. 비전을 향한 책읽기를 시도하라. 자신의 비전을 이미 성취한 사람들이 쓴 책을 읽어라.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실무자들이 쓴 책을 읽어라. 비전이란 나의 미래를 생생하게 바라보는 기술이다. 비전을 품는 순간,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나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비전은 지금의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오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거짓 희망’이다. 책 읽는 비전가, Reading Visionary가 되라. 리딩 비저너리는 날마다 성장하는 영혼이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당신의 비전이 조금씩 명확해질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당신의 비전으로 성큼 다가서게 만드는 과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과업을 완료하는 순간, 당신은 한 시간 전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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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愛之
欲基生


_ 『논어』 12권 10장.

나의 해석 : 그이를 사랑한다면
                그이가 살아감을 꾀하는 것을 바라라.

일반적 해석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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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랑 이름 계속 본다고 애들 이름이 외워지는 건 아냐.
개인적 사건(event)을 만들어야 한다.
들이대고, 상담하고, 추억을 만들고, 다투기도 하고 실랑이도 하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_ 강대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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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잔인한 시다.
그러나 현실은 시보다 더욱 잔인했다.



                 학살2

김남주(金南柱)


오월 어느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앗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잡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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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컵에 양파를 담아라.
양파는 세 개를 담아라. 각각 다른 물컵에.

매일 아침, 하나에는 '사랑해.'라고 말하라.
               하나에는 '미워!'라고 말하라.
               하나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자, 어떤 양파가 가장 안 자랄까?

바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양파다.



미움보다 무서운 게 하나 있다.
바로
무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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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뼛속까지 비워낼 수 있는 고통과 비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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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이의 강점으로 인해 그이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이의 약점으로 인해 그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
잡초마저도 자기들이 살아갈 흙덩이만큼은 지켜낸다.
우리도 우리 삶의 공동체만큼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악이 우리에게 선을 인식시키는 것과 같이,
고통은 우리에게 기쁨을 느끼게 한다.
:

‘영등포 슈바이처’ 기적을 잇는 요셉의원 최영아원장

2009.01.24 11:15 | ♡ 사람 & 希望 | 무소유

http://kr.blog.yahoo.com/earnest3160/5793 주소복사

‘영등포 슈바이처’ 기적을 잇는 요셉의원 최영아원장


"평생 의료봉사하며 살겠다" 다짐 실천...생활위해 백만원 월급받아





서울 영등포동 ‘쪽방촌’ 입구. 무너져 가는 단층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에 20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몸마저 망가진 행색이 역력했다. 이들이 찾은 곳은 요셉의원이었다.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던 선우경식 전 원장이 작고 직전까지 인술을 펼쳤던 병원이다.

의원의 낡은 출입문을 열자 의약품 냄새와 함께 다소 거북한 냄새가 훅하고 다가왔다.

오래 씻지 못한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개의치 않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의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노숙인으로 보이는 40대 환자에게 “술 끊고, 약을 꼬박꼬박 드세요. 꼭 나을 수 있으니까 잊지 말고 약을 드세요”라며 엄마처럼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최영아 원장. 올해로 서른아홉인 그는 이화여대 의대를 나온 내과 의사다. 지난해 4월 자선의료기관 요셉의원의 새 의무원장이 됐다. 선우 원장이 작고한 다음날이었다.

최 원장은 2001년 전문의 자격증을 따며 “평생 의료봉사를 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대학 시절 의료봉사를 나갔다가 약 한 번 먹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 때문이었다.

같은 해 선우 원장의 소문을 듣고 요셉의원을 찾았다.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보고 계셨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자에게 200만원어치의 약과 주사액을 쓰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없는 사람이라고 질 낮은 의료서비스를 받게 해선 안 된다’는 원칙에 충실하신 분이셨어요.”

이후 선우 원장을 따라 알코올중독자 모임과 꽃동네를 다니며 환자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오랜 거리 생활에 지쳐서 그런지, 의사에게 욕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게 예사예요. 선우 원장님은 ‘아프니까 좀 보살펴달라고 그러는 거다’고 가르치셨어요.”

2004년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요셉의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병원을 그만둔 건 한 환자 때문이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청송 교도소에서 15년을 복역한 환자였다.

형광등을 깨뜨려 의사들 목에 들이밀 정도로 난폭했다. 직원들이 모두 “그 사람 못 오게 하자”고 했지만, 그가 감쌌다.

“선하든 악하든, 아픈 사람은 모두 우리 환자잖아요.” 결국 견해 차이로 병원에서 떠밀리다시피 나온 그에게 선우 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최 원장이 받는 월급은 100만원.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의사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베풂과 사랑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요셉의원은 19일부터 한 달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환자를 위한 샤워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다. 서울시에서 공사비 1억원을 지원해 줬다.

“후원자가 3000명만 됐으면 좋겠다”던 선우 원장의 생전 소원도 이뤄졌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후원자가 3800여 명으로 는 것이다. 최 원장은 “돌아가셔서도 기적을 만드는 분”이라고 했다.

그에겐 소망이 하나 있다.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사회에서 버림받아왔어요. 피해 의식이 강하죠. 엄마 같은 사랑을 줄 때 상처가 아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엄마가 되어가는 중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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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스스로 버는 돈만이 너의 것이다.
 그러나 그 돈 또한 너만을 위해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래... '나 혼자서' 번 돈은 없다.
내가 돈을 버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땀과 이 사회의 기반 시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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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柳一韓, 1895∼1971 ) :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 우리 나라 최초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준 훌륭한 사업가이다.

●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림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업고교 학생들의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며 그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유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초미리는 딸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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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백>이 쓴 ‘흠 있는 진주’라는 소설에 돈 많은 진주 수집가의 얘기가 나옵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진주를 갖는 소망을 가진 이 사람은 좋은 진주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가장 멋지고 큰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진주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늘 그 진주를 꺼내 보는 즐거움으로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값비싼 진주에 작은 흠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작은 흠이 마음에 걸렸고, 진주의 값어치를 더 높이기 위해 흠이 있는 부분을 조금 깎아 내기로 하였습니다.
진주는 한 꺼풀씩 덮이면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그 흠을 없애기 위해 한 꺼풀만 벗겨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꺼풀을 벗겨도 그 흠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그 흠을 없애기 위해 계속 진주를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진주에서 흠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진주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존 스타인백은 그 소설을 통해서 ‘인간은 흠이 있는 진주와도 같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흠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깎아내어도 벗겨지지 않는 흠 말입니다.


*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보석상을 하는 부호가 유럽 여행을 하다가 진귀한 보석 하나를 발견하여 거액의 돈을 주고 그 보석을 샀습니다.
물론 자기 나라에 돌아가 그 이상의 돈을 받고 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와 보석을 이리 저리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살 때는 보지 못했던 작은 흠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 이런 흠이 있었다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감정가들도 그 흠이 보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보석은 제 값을 받기는커녕 작은 흠 하나로 인해 한없이 가치가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보석을 다시 원래의 가치로 되돌릴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는 오랜 노력과 고뇌 후에 한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석의 작은 흠에 장미꽃을 조각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우 어렵고 돈이 드는 작업이긴 했습니다만,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전문 세공사에게 부탁하여 보석의 작은 흠에
장미꽃을 그려 넣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 결과, 장미꽃 조각 하나로 그 보석의 가치는 몇 배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흠이 있고 약점도 있습니다. 감출 수도 없고 벗겨 낼 수도 없는 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약점을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말고, 그 약점을 정당화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 흠 위에 장미꽃을 조각하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흠이 꽃으로 조각되기 까지는 아픔도 있을 것입니다.
흠이 드러나는 부끄러움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인내해야 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으로 새겨지기 위해서는 입을 다물고 보석상의 고정틀에 꼼짝 않고 물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점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흠이 전부인 것처럼 시선이 집중되는 부끄러움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참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그 보석의 가치는 더 떨어질지 모릅니다.
흠집만 더 커진 더 보기 흉한 보석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흠 위에 꽃을 새겨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환경은 조각칼을 들고
내게 다가 오지만 난 그 조각칼에 메이기 싫어 피하고 있습니다.

흠이 드러날 때 감추려고만 했고, 자존심 상할까 몸부림치는 통에 내 흠집 위에 새겨져야 할 장미꽃 대신 이리저리 그어지고 문질러져 일그러진 모습은, 보석의 가치를 더 떨어뜨린 것 같아 후회스럽습니다.


* 내 인격의 아름다운 꽃은 내 인생의 흠 위에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 흠으로 인해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고, 그 약점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 부족함으로 인해 은총을 바라보게 되니까 말입니다.
:
홍영의/숙명여대 연구교수, 개경학연구소장 
_ 안산시민신문 http://www.ansansimin.com/

  장자(莊子) 변무(騈拇篇)에는 “천하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날 때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鳧脛雖短 續之則憂),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鶴脛雖長 斷之則悲).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라고 하여,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나 도리(道理)에 어긋난 일을 억지로 행함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각각의 사물에는 자기만의 적절한 면이 있으므로 함부로 손익(損益)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물에는 각각 주어진 성질이 있으므로 과부족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 역시 각자 지닌 개성이 있으므로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각각 태어난 기질을 가지고, 직분에 따른 책무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면 공연히 번거로울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직분(職分)에 따른 각각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학의 다리를 자르거나 오리의 다리를 늘린다고 해서 학이 오리가 되지 않고 오리가 학이 되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어야만 ‘학’이 되고 ‘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장자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장자의 태도를 지금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장자가 그러했듯이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은 정서적인 유대와 공감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연이든 남의 마음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하여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것은 이것에서 나왔으며, 이것 또한 저것에서 나왔다. 이것이 또한 저것이오. 저것 역시 이것이다(彼出於是 是亦因彼 是亦彼也 彼亦是也)’라고 하여 모두가 하나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학의 길다란 다리가 거추장스럽게 보여 애정이 가득한 마음으로 학의 다리를 잘라주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학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기뻐했을까요, 아니면 슬퍼했을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잣대로 남의 삶을 평가하거나 조작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고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존재에게 통용되는 절대적 기준, 진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보다 많다고 여기는 것, 내가 남보다 적다고 여기는 것은 결국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그것조차도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지극한 무소유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장자가 말하려는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분명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오리의 다리는 너무 짧고 학의 다리는 너무 길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사람의 관점에서 ‘그럴 것’이란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리나 학의 입장에서는 원래보다 길어지거나 짧아진 다리가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걱정해주거나, 남을 욕하는 것도 바로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만을 강요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는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와 달라 보인다고 해서,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안 되듯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 이걸 ‘소통’이라고 합니다. 안산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보다 지금은 지켜보아야 할 때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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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를 낼 때 ’가위‘를 내라. 그것이 ’돈‘이다

월터 P. 크라이슬러 - 충동적으로 구매하라

어린 나이의 크라이슬러는 돈도 학력도 없었다. 아버지는 지방 철도회사의 기관사였고 형도 똑같이 철도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도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연스럽게 철도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것말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지만 정비공장의 일보다는 그래도 청소계 작업에 근무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 크라이슬러가 훗날 빛나는 성공을 거둘 인물이 될 것이라 보여질 만한 구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기계광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기계에 대해선 무조건적일 정도로 열렬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매일 정비공장에서 작업 중간마다 여러 종류의 기계를 살펴보고 만져보고 조립하는 일을 생각하며 커다란 희열에 사로잡히곤 할 정도였다. 이윽고 그는 청소계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기계기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열심히 공부한 끝에 2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베테랑 기계기사가 무색해질 정도로 기술과 지식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을 무기삼아 미국 중서부를 종횡무진하다시피 하며 각지의 철도회사에서 기사장과 공장의 총감독으로 맹활약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그는 기계에 대한 순수한 흥미를 느끼는 것 외에 기계를 통한 수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현장의 작업 속에서 기계를 이용한 운송업의 전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시카고 모터쇼에서 ‘로코모빌(1899년 제작된 증기자동차)’이라 이름 붙여진 꿈의 자동차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뒷날 이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 차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4일간 내내 자동차쇼가 벌어진 현장을 떠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자동차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 그의 몸과 마음에 소용돌이친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자동차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가품일 때였다. 더구나 모터쇼에 출시된 ‘로코모빌’은 최신 고급차였기 때문에 그는 끙끙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은행에서 자그마치 5천 달러나 되는 거금을 빌려다 그 자리에서 자동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열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가의 차를 구입한 뒤에는 반드시 드라이브 삼매로 나날을 보내기 쉽지만 크라이슬러는 만들어보고 싶은 마니아답게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코모빌을 단 한번도 운전해보지 않고 가져온 그대로 분해했다 다시 조립했다. 그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한번 시승을 해보았고 시가지를 한 바퀴 주행해본 다음, 다시 분해했다가 재차 조립했다. 이렇게 분해-조립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던 것은 로코모빌을 하나의 교과서로 삼아서 철저하게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를 보면서 친구들은 “저 친구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냐?”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훗날 미 자동차업계 빅3의 하나로 군림할 크라이슬러사 창업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거액의 빌린 돈을 갖고 로코모빌을 충동 구매했을 당시, 그의 내면에는 창업의 힌트 같은 것도 없었고 최신의 수송수단에 투자해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구매 당시 참을 수 없이 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의 짜릿한 ‘흥분‘만을 느꼈을 뿐이라고 했다. 뒷날 크라이슬러는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성공의 비결은 ‘열성’이라기보단 ‘흥분(exciting)’이라고 봅니다. 나는 사람이 흥분하는 것을 볼 때 가장 좋아요. 사람은 흥분했을 때 인생을 성공시킬 수 있으니까요.”

:
_ 강민석 칼럼사회부문 차장 
_ 중앙선데이| 제125호 | 20090801 입력    
 

한휴(韓休)는 중국 당 현종 때의 재상이었다. 그는 직언을 서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의 쓴소리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현종의 얼굴이 야위어갈 정도였다. 한 신하가 말했다. 
“한휴가 재상이 된 뒤 폐하가 매우 수척해지셨습니다. 어찌 파면하지 않으십니까.”
현종이 답했다. “한휴 덕분에 나는 야위었다. 그러나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

뉴욕 헤럴드 기자 출신의 루이스 하우는 24년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분신이었다. 루스벨트보다 11살 더 많은 그는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미스터 노 맨(No man)’이었다. (『1인자를 만든 2인자들』 중)
루스벨트가 아이디어를 내면 하우는 있을 법한 모든 결점을 찾아냈다. 불륜에 빠졌던 루스벨트의 이혼을 막은 것도 그였다. 말을 듣지 않을 땐 욕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하던 중이었다.
“루스벨트, 이 멍청이! 분명히 말하는데 절대로 안 돼.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 당신은 정말 지독한 바보야.”
루스벨트가 고집을 피우면 물론 ‘예스’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이었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해봐 이 돼지머리야. 나중에 내가 말 안 해줬다고 그러지 마.”
하우의 ‘노’는 어떤 효과를 가져왔을까. 일단 사람들이 허심탄회하게 여론을 전하러 하우를 찾았다. 하우의 ‘노’는 루스벨트와 세상 간의 소통이었다.

‘노 맨’을 휘하에 뒀을 때와 두지 않았을 때 통치자들의 운명은 달라진다.
당 현종은 한휴나 요숭 · 장구령 같은 명신이 재상으로 보좌하는 동안엔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후세는 이를 ‘개원(開元)의 치(治)’라 부른다. 말년에 유능한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 같은 ‘아부 맨’들을 중용했을 때 현종은 안사의 난을 겪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1936년 하우가 병사한 뒤 언론은 “하우의 조언이 없어지면서 루스벨트가 기세와 방향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이명박 대통령 곁에는 과연 한휴나 하우가 있을까.
6월 21일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 임명 때다. 청와대는 “이른바 검찰 조직 일신이라는 것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인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7월 28일 김준규 후보자를 낙점할 때의 청와대 브리핑은 이랬다.
“소통을 중시하며, 유연하고 합리적인 리더십의 소유자로 검찰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적임자. 글로벌 스탠더드로써 검찰 개혁을 이끌 적임자.”

인사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가 한 달 만에 180도로 바뀌었다. 검찰은 그대로인데 한 달 전에는 조직을 일신할 사람, 이제는 안정시킬 사람이란다. 그동안 검찰 수장 없이 조직의 일신이 다 이뤄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이제는 검찰 조직을 일신할 필요가 없다는 얘긴지 헷갈린다. 검찰 총수에게 왜 ‘글로벌 스탠더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한 달 전에는 전혀 언급조차 안 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검찰엔 어떤 사람이 필요한건가.
좀 극단적으로 꼬집자면 ‘인사청문회 통과’란 컨셉트 말곤 이번 인선에선 아예 원칙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청와대의 고충도 클 것이다. ‘천성관’이라는 잘못된 카드를 내놓았다 스텝이 꼬여도 왕창 꼬여버렸으니 말이다.

‘천성관 카드’ 등장 과정을 보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해진다.
검증 작업에 참여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최근 본지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천 전 후보자를 총장 후보로 추천한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이 대통령이 천 전 후보자를 여러 차례 칭찬했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를 괜찮게 보고 있다는 감을 받은 것이다.” 중앙SUNDAY 123호 4면
이 설명대로라면 청와대 민정수석이 천성관 전 후보자를 추천한 배경은 ‘대통령의 의중’이었다. 대통령 심기만 맞추면 후보에 대한 여러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발표 때마다 달라지는 인사 컨셉트도 사람에 맞춰 만들어낸 것 아닐까.

참모는 대통령의 ‘반사체(反射體)’여야 한다. 대통령과 ‘부딪쳐서’ 빛을 세상에 보내야 한다. 그러나 예스맨들은 스스로 ‘발광체(發光體)’가 되려 한다. 발광체는 서로 빛을 빨아들이며 수를 줄여나가려는 속성이 있다. 마지막에 하나 남은 발광체가 되기 위해서다. 그들은 절대 ‘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노 맨’ 없는 대통령이 성공했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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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첫 번째 형상은 두려움이며, 새로움의 첫 번째 형상은 경악이다”
-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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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최초의 여성 제독이자 컴퓨터 전문가였던 그레이스 호퍼. 오늘날 프로그램의 오류를 일컫는 '버그'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녀는 복무기간 동안 국방 전산화를 선도하면서 소장까지 진급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종이 문서와 타자기에 익숙해져있던 각 군의 실무자들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이라며 전산화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국방 전산화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고정관념과 관습 때문이었다. 즉 익숙한 것을 고수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미군 지도부의 정서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당시 호퍼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무실에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시계를 걸어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저기 거꾸로 가는 시계를 보십시오. 저 시계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숫자 배열도 반대로 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시계 바늘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게 했지만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를 아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레이스 호퍼는 1986년, 여든 살의 나이로 명예롭게 전역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지금껏 이렇게 해 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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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프로권투가 최고의 인기 종목으로 떠올랐던 1960~70년대. 지금의 축구선수 박지성에 버금가는 스포츠 스타는 WBA, WBC 세계 챔피언이었다. 많은 청소년들이 프로권투선수를 꿈꾸며 권투 도장을 찾았고 어린 홍수환 역시 그런 학생 중 하나였다. 홍수환은 고교 2학년 때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챔피언인 김기수를 동경하며 권투를 시작했고, 마침내 1974년 7월 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세계 밴텀급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승리는 계속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에서 치른 2차 방어전에서 4라운드만에 도전자의 강력한 펀치 세례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그를 최고의 권투선수라고 치켜세우던 사람들은 무기력한 거의 경기 모습에 실망하고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역시 운으로 챔피언 된 거야'라는 주변의 냉소와 멸시에, 그는 권투를 그만 두려고 했다. 아직 은퇴하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이제 웬만큼 돈도 벌었고 고생하며 권투를 계속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자신의 후원회장이었던 정운수 씨를 찾아가 권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원회장의 반응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수환아, 솔직히 너한테 실망했다. 권투는 맞고 쓰러지면 말리는 심판이라도 있지만, 세상에서 쓰려져 봐라. 모르긴 몰라도 발로 짖이겨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게 세상이다. 넌 이미 너 자신에게 졌구나!!"
돌아서는 길에 홍수환은 자신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힌 문장을 떠올렸다. '넌 이미 너 자신에게 졌어!' 그러자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파나마로 떠났다.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의 복싱 영웅 카라스키야를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1만 6천 명의 관중과 그 텃세 속에서 그는 네 번이나 다운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일어서지 못한다면 나는 또다시 나 자신에게 지는 것이다."라고 수없이 되뇌며 기적처럼 일어섰고, 마침내 챔피언을 눕히고 4전5기(四轉五起)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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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하버드대학의 데이빗 맥클랜드(David McClelland) 박사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의 침에는 면역항체 'Ig A'(면역글로블린항체)가 들어 있는데, 근심이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말라 이 항체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연구를 주관한 맥클랜드 박사는 하버드대학생 132명의 'Ig A' 수치를 조사하여 기록한 뒤에, 그 학생들에게 인도의 캘커타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그 그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보고 난 후, 학생들의 타액 속에 있는 “Ig A"(면역글로블린항체A(Immunoglobulin A)'의 수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비교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랍게도 학생들의 대부분에게서 면역글로블린항체A가 50% 정도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맥클랜드 박사는 “선한 행동으로 유발된 감동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직접 선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거나, 듣거나 그런 사람의 일생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면역력을 높여주는 생물학적 사이클의 변화(Entrainment)를 일으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은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라고 명명했습니다. 줄여서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라고 불리는 이 이론의 결론은 내가 직접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단지 타인에 대한 봉사를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면역능력이 향상되어 우리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봉사하는 분들을 부지런히 만납시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봅시다. 그 분들을 따라가서 봉사하는 모습을 지켜봅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의 몸에서 면역글로브린항체 A가 샘솟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하고 장수할 것입니다.

:

유추프라카치아라는 식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유추프라카치아는 주로 아프리카에 서식하고 있는 식물이다. 이 식물은 사람이 실수라도 건드리면 견디지 못하고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추프라카치아를 너무나도 예민하기만 한 "결벽증의 식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식물학자가 이 가엾고 여린 식물을 연구하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우연히 스쳐지나 가는 사람에게 만져지면 이 식물은 천천히 죽어가지만
어제 건드렸던 그 사람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건드려주면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건강하게 잘 살아간다는 것이다.
단 한번의 무관심한 손길이 닿으면 외로워 견디지 못하지만
사랑을 보내주면
그 사랑을 먹고 사는 식물.

식물조차 관심 받고 싶어하고 사랑 받지 못하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이는 사랑 받고 싶어하고 관심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계바늘이 점점 빨리 돌아가고,
웃음을 잃어가는 요즘 사회는 점점 그러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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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처음에 수용소의 많은 수감자들 중에서 체력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들이나 살아가는 요령을 민첩하게 터득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다른 사람들은 다 쓰러져도 저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겉보기에는 허약하고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붉은 저녁노을의 장엄함, 동료의 흥얼거리는 노래, 수용소 입구에 핀 들꽃 같은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람.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도 병든 동료에게 자신의 빵을 기꺼이 나누어주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았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훗날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최후의 생존자들을 가리켜 '최후의 자유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최후의 자유란 인간이 외부의 환경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즉 나치가 유태인 수감자들의 육신은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었지만,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정신까지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로고 테라피(Logo Therapy), 즉 의미요법이라는 정신치료 이론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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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漢)나라 개국공신인 장량의 일화이다. 어느 날 산책을 하던 그에게 어떤 노인이 다가오더니 한 쪽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러고는 턱으로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이 꼬마, 저거 주워 와!" 장량은 낯선 노인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신발을 주워왔다. 그러자 노인은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신겨 줘야지!!"하며 발을 내밀었다. 장량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지만 공손히 노인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닷새 후에 여기 다시 나와!"라고 말했다. 장량이 "무슨 일이시기에…?"라고 물으려 하자, 노인은 "나오라면 나오지 뭔 말이 많아!!"라고 호통을 치고는 자리를 휭하니 떠났다.

닷새 후 장량이 다리로 갔더니 노인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장량을 보자마자 "어른과 한 약속에 늦어?"하고 화를 내더니 또다시 닷새 후에 보자며 사라졌다. 장량은 다음 약속날이 다가오자 전날 다리에 나가 밤을 새우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노인을 기다렸다. 새벽녘에 약속 장소에 나온 노인은 먼저 나와 있던 장량에게 '인내를 아는 쓸만한 인재'라고 칭찬하며 강태공이 주나라를 멸망시킨 비법을 기록한 「태공병법」을 건네주었다. 장량은 이 병서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물리침으로써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천년 뒤,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는 자신의 저서인 「유후론」에서 장량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하며 "군자는 남이 참지 못하는 것을 참고, 남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한다. 남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뎌야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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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문진영(고양예고 3학년)
_ 내가 약간 수정함.


  독수리가 되고 싶다,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한번도 뭐가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또래 아이들이 한번쯤 막연히 꿈꿔보는 연예인이라는 것도 말이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커서 뭘 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땐 모두들 웃고 넘겨버렸다. 물론 나종차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고2 겨울방학을 흘려보개고 있는 지금, 남들보다 뛰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너무도 엉뚱하게 독수리가 되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을 많이 배웠지만, 두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도레미파솔을 치는 게 가장 쉽고 재밌듯 내가 배웠던 태권도나 기타도 그랬다. 기본 동작을 배우며 설레거나 아주 쉬운 것을 해냈을 때의 뿌듯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어려워지는 동작이나 멜로디에서 헤매다가 결국엔 학원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시작하는 것이 너무 쉬웠던 것만큼 포기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장래 희망이 없다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학년은 올라갔고, 오히려 고학년이 된다는 것에 더 끌렸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최선을 다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외워야 할 동작이 맣아지고 오선지에 띄엄띄엄 걸려있던 음표들이 빽빽해지면, 몇 번 해보지도 않고 덮어버렸다.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답답하고 손가락이 아프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해보겠다, 라는 의지가 없었고 모든 걸 금방 질려하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었던 것 같다.
  독수리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실제로 독수리를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본 게 전부였다. 절벽 끝 바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빠졌다. 그러다 산 중턱에 사슴 몇 마리가 지나가면 빠르게 한 마리를 낚아채 산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렇게 죽은 사슴을 다시 잡아 절벽에 있는 둥지로 돌아간다. 프로그램의 해설자는 독수리의 사냥법이 아주 기막히다고 말했다. 땅에서 다른 동물들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무서워하지만 어떻게 보면 동물의 왕은 독수리일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 몸통의 두 배만한 날개를 펄럭이며 새들 중에 가장 높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나는, 부러웠다. 공부는 물론 어느 것 하나도 잘하는 게 없다고 좌절하던 나에게, 태어날 때부터 사냥에 유리한 발톱과 부리, 그리고 크고 힘센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부러울 수밖에.
  나는 그렇게 막연히 독수리를 부러워했다.
  어느날, 케이블 채널에서 불법으로 야생동물을 생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봤다. …<중략>…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 사납고 그만큼 힘이 세죠. 하지만 이렇게 강한 독수리가 되기까지 독수리는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독수리의 강한 모습만 기억할 뿐 그 뒷면은 알지 못하죠.
  독수리는 나이가 들면 부리와 발톱이 구부러져 더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때에 이르면 독수리는 바위에 부리를 찧어 부스러뜨리고, 새로운 부리가 돋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약 150일 정도가 지나고 부리가 새로 돋으면 독수리는 자신의 깃털과 발톱을 뽑아 버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지요.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독수리는 강해질 수 ……."
  내레이션이 아주 점잖은 모솟리로 내 귀에 들어왔다. 독수리가 큰 눈을 껌벅이며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독수리의 눈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깊어 보였다.
  독수리가 되고 싶다. 그 어떤 것에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는 나에게, 조금만 힘들어지고 버겁게 느껴지면 금방 포기해 버리는 나에게 독수리는 아주 좋은 본보기이다. 독수리는 자신의 발톱과 부리가 구부러져 굶어 죽게 되어도, 부리를 바위에 찧으면서까지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런 반면 나는 항상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툴툴거리기만 했다. 그러면서 다른 새들보다 더 높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만 했다.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찧으며 느끼는 고통이나 인내를 겪어본 적도 없고, 더 높이 날기 위해 몇 번을 뒤뚱거려 보지도 않았으면서…….
  독수리처럼 살고 싶다. 툭, 하고 내게 던져진 것만 받아먹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대가를 얻고 싶다. 독수리가 날기 위해 뒤뚱거리는 것처럼, 어려운 걸 틀려보기도 하고, 몸에 익숙치 않아 넘어져 보면서 배워 나가고 싶다. 한번에 높이 오르는 걸 바라기보다는 천천히 날개짓을 하며 좀더 높은 곳을 날고 있는 나를, 꿈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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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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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같은 사람
               
                          / 법정 스님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권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함께 있으면서
부딪친다고 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그저 날마다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삶에 녹이 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가꾸고 다듬는 일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면서 안으로 헤아리고 높이는 일에
근본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행복은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한 것으로 전락하는 세상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므로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아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또는,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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