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슈바이처’ 기적을 잇는 요셉의원 최영아원장

2009.01.24 11:15 | ♡ 사람 & 希望 |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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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슈바이처’ 기적을 잇는 요셉의원 최영아원장


"평생 의료봉사하며 살겠다" 다짐 실천...생활위해 백만원 월급받아





서울 영등포동 ‘쪽방촌’ 입구. 무너져 가는 단층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에 20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몸마저 망가진 행색이 역력했다. 이들이 찾은 곳은 요셉의원이었다.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던 선우경식 전 원장이 작고 직전까지 인술을 펼쳤던 병원이다.

의원의 낡은 출입문을 열자 의약품 냄새와 함께 다소 거북한 냄새가 훅하고 다가왔다.

오래 씻지 못한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개의치 않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의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노숙인으로 보이는 40대 환자에게 “술 끊고, 약을 꼬박꼬박 드세요. 꼭 나을 수 있으니까 잊지 말고 약을 드세요”라며 엄마처럼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최영아 원장. 올해로 서른아홉인 그는 이화여대 의대를 나온 내과 의사다. 지난해 4월 자선의료기관 요셉의원의 새 의무원장이 됐다. 선우 원장이 작고한 다음날이었다.

최 원장은 2001년 전문의 자격증을 따며 “평생 의료봉사를 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대학 시절 의료봉사를 나갔다가 약 한 번 먹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 때문이었다.

같은 해 선우 원장의 소문을 듣고 요셉의원을 찾았다.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보고 계셨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자에게 200만원어치의 약과 주사액을 쓰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없는 사람이라고 질 낮은 의료서비스를 받게 해선 안 된다’는 원칙에 충실하신 분이셨어요.”

이후 선우 원장을 따라 알코올중독자 모임과 꽃동네를 다니며 환자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오랜 거리 생활에 지쳐서 그런지, 의사에게 욕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게 예사예요. 선우 원장님은 ‘아프니까 좀 보살펴달라고 그러는 거다’고 가르치셨어요.”

2004년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요셉의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병원을 그만둔 건 한 환자 때문이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청송 교도소에서 15년을 복역한 환자였다.

형광등을 깨뜨려 의사들 목에 들이밀 정도로 난폭했다. 직원들이 모두 “그 사람 못 오게 하자”고 했지만, 그가 감쌌다.

“선하든 악하든, 아픈 사람은 모두 우리 환자잖아요.” 결국 견해 차이로 병원에서 떠밀리다시피 나온 그에게 선우 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최 원장이 받는 월급은 100만원.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의사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베풂과 사랑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요셉의원은 19일부터 한 달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환자를 위한 샤워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다. 서울시에서 공사비 1억원을 지원해 줬다.

“후원자가 3000명만 됐으면 좋겠다”던 선우 원장의 생전 소원도 이뤄졌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후원자가 3800여 명으로 는 것이다. 최 원장은 “돌아가셔서도 기적을 만드는 분”이라고 했다.

그에겐 소망이 하나 있다.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사회에서 버림받아왔어요. 피해 의식이 강하죠. 엄마 같은 사랑을 줄 때 상처가 아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엄마가 되어가는 중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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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소리 http://www.badaksori.com/

영욱이형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된 창작판소리극 공연.
"제목이 뭐예요?"
"어 뭐... '닭들... 날다'였던가?"
이 말을 듣고 영화 '치킨 런'을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용보다는 창작판소리라는 것에 끌려서,
그리고 형이 "이분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라고 하는 추천에 이끌려서 공연을 보러 갔다.

대학로 정美소라는 공연장에 들어서자 마자, "1분 후 공연 시작합니다~"하는 소리. 다행이다, 하며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공연 전 설명부터 판소리로 시작되는 게 눈길을 끌었다. 그냥 건조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가락에 실어 말하는 것('아니리'라고 할 수 있겠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새삼 깨달았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반부에는 닭장 속에 갇힌 닭들이 금지된 꿈을 꾸다가 고생을 겪고 탈출하는 내용이었다. 거의 '치킨 런'을 연상시키는 내용. 그렇지만 사냥개, 그리고 닭반장의 말들이 현대의 우리 사회를 풍자적으로 반영한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에 깔려 있는 해학적인 요소들이 같은 내용이라도 좀더 판소리적인 분위기로 바꾸고 있었다. 닭할아버지가 닭 조상에 대해 설명할 때, '닭싸움'을 가져와서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싸움도 잘 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이 이야기의 상상력과 변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단초를 보여주고 있었다.
창의 가사도 새로웠다. 분명 가락은 판소리 가락인데, 가사 내용이나 어투는 현대적이었다. 특히 꼬끼가 꼬비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는, 가사만 들어보면 최신 가요의 이별 가사와 다르지 않았다. 전통적 음에 현대적 말. 약간은 어색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새로운 어울림. '어긋남의 합창'이라고 할까?

3장의 '트럭 운전사의 증언'에서는 해학적 아름다움이 매우 뛰어나게 드러났다. 역시 판소리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소리꾼의 재치와 능청스러움, 애드립이 빛을 발하는 장르이다. 그리고 혼자 하는 판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연극처럼 움직이는 판소리극이다보니,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닭들의 꿈, 날다'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이야기라고 주저없이 말하겠다. '닭들의 꿈, 날다'의 이야기는 깊이가 있지만 가라앉지는 않았고, 그저 웃기는 듯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며, 새로움 속에서 원전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야기의 깊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야기가 담고 있는 철학과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듯한 개그도 그 속에 뼈를 감추고 있으면, 자지러지게 웃고 나서 묵직한 깊이가 느껴진다.
'닭들의 꿈, 날다'는 현대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담고 있다. 통제된 사회, 꿈을 잃은 사회에 대한 건 물론이거니와, 비무장지대 안의 폭력과 파괴(지뢰밭), 분단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까지 드러낸다. 심지어 조류독감의 대유행과 그에 따른 닭들의 집단 살처분은, 마른 기침 한 번 해도 "당신 신종 플루 아냐?"라고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는 작금의 세태까지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이가 있는 작품은, 자칫 무거워질 수가 있다. 자신의 깊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없이 진지하게만 흘러가다가 진지함을 강요하게 되는 작품은 부지기수다. 잠수함이 내용물을 많이 실을 수록 그만큼의 공기도 많이 실어야 하는 것처럼, 문학작품도 깊이 가라앉을수록 부력을 일으킬 산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닭들의 꿈, 날다'는 그 산소를 해학에서 찾았다. 특히 판소리 특유의 해학미는 작품 전반을 감돌며, 관객들이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도록 만들었다.


'닭들의 꿈, 날다'가 더욱 대단한 것은, 웃음이 그저 해학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닭들의 꿈, 날다'에는 그냥 분위기 반전을 위한 웃음이 아니라, 닭, 독수리, 할머니 등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꼬끼'가 처음에 자신의 꿈을 밝히면서 "성대모사요!"라고 했을 때 그 엉뚱함에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성대모사가 작품 후반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쌍둥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전달해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변화했을 때, 웃음은 웃음을 넘어 희망으로 부상한다. 그 희망은 할머니의 죽음이 주는 슬픔까지도 새로운 원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 슬퍼하고 있는 멍구(강아지)에게, 꼬끼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어!! 우리가 그걸 전해주자!!!"라고 말하며 슬픔을 극복하게 만들지 않는가?(대사가 정확한지는...;; 이래서 대본이 필요해요ㅜㅠ)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상상력은 '닭수리'였다. 다리 없는 독수리와 날개 없는 닭이 함께 하늘을 난다니! 날개 있는 독수리와 다리 있는 닭이 함께 하늘을 난다니!!!
'닭들의 꿈, 날다'는 '없는'이 아니라 '있는'에 주목했다. '없는'에 주목하면 장애가 되지만, '있는'에 주목하면 가능성이 된다. 말로 하면 쉬워 보이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은, 정말 UFO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상상력은 절망으로 가득찬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다들 자신의 현실 속에서 부러지고 빼앗기고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만다.
그러나 상상하면, '있는'는 주목하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주류가 아무리 강력하고 폭력적이라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를 들면... 희망, 사랑, 상상력, 의지,,, 이런 것들......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런 엄청난 상상력이 원천이었는지, '닭들의 꿈, 날다'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많다.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보면,

"비무장지대는 완전무장지대야."
"새들이 많다고 해서 새들의 천국인 건 아냐. 그리고 인간들에게도, 천국은 아닌 것 같아."
"우린 살아온 공간, 살아온 과정은 다르지만, 살아온 흔적, 살아온 슬픔은 같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어!"


신기한 것은 그렇게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닭들의 꿈, 날다'가, 받아들이기 힘들다거나 버겁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상상력은 충격을 주고, 충격을 이질감을 준다. 그 이질감이 왜 '닭들의 꿈, 날다'에는 거의 없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변용, 다른 말로 패러디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닭들의 꿈, 날다'에는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한다. 처음에 UFO를 발견한 데에서는 패닉의 <UFO>를 떠올렸다(패닉의 <UFO> 역시 상상력이 대단한 노래이다. 짓밟히고 죽어간 사람들이 UFO를 타고 다시 되돌아온다는 발상.). 조류독감 때문에 흰 옷을 입은 방역대원들이 닭들을 집단폐사시킬 때는 영화 <괴물>이 연상되었다. 새다리골절전문치료사인 할머니, 새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할머니는 알다시피 <흥보가>를 변용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철조망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 만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나는 이산가족들(소설 <숨쉬는 영정>)은 모두 한국 문학 작품 속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모티브들이다. 그렇게 익숙한 원전들이 기반이 되어 '닭들의 꿈, 날다'가 만들어졌기에, 상상력이 거리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닭들의 꿈, 날다'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 쓸 말이 많아지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작품이다. 장르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한가지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연 날짜가 너무 짧았다는 것!

앞으로도 '바닥소리' 소리꾼들, 그리고 '닭들의 꿈, 날다'를 만드신 여러 재주꾼들의 힘으로,
이런 명작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나누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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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부터 모든 매체에서 한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나영이' 사건.
나영이.

우선 이 글에서는 임시로, '그 사건'이라고 부르자.
왜냐고? 나는
'그 사건' 자체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사건'을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해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피해자학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거의 발달되어 있지도 않지만, 형법의 철학과 역사가 조금이라도 중시되는 나라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 아니, 굳이 연구까지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를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대해 누가 반론을 제기할까? 재판에서는 흔히 원고(검사)와 피고(범죄자)의 대결 구도가 주목을 끌지만, 그 주목받지 못하는 방청석 구석에서 피해자와 그/녀의 가족들은 항상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건을 명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매체가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 사건의 내용보다도 사건의 이름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의 이름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와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회자된다. 그 기간이 얼마나 길게 갈지도 모른 채.(물론 우리 사회의 특성 상 그리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


회자(膾炙)된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지?

회膾 : 잘게 저민 날고기 / 회치다
자炙 : 고기를 굽다


'나영이 사건'이 회자된다.
'나영이 사건'이 잘게 저며지고, 회쳐지고, 고기 굽듯 구워져서, 사람들에게 소비된다.
'나영이'가 잘게 저며지고, 회쳐지고, 고기 굽듯 구워져서, 사람들에게 씹힌다.(알다시피, '씹히다'는 속된 의미로 '부정적으로 거론되다'는 뜻이다.)

라고 느끼는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까?

물론 '나영이'는 가명일 것이다.(만약 가명이 아니라면, 그 사건 이름을 최초로 붙인 사람은 나영이를 정말 두번 죽이는 살인자다!)
그렇지만 나는 불편하다.
사실 내 친구 중에도 나영이가 있는데, 뉴스에서 '나영이 사건'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용을 들을 때마다 섬찟섬찟 놀라곤 한다. 마치 친구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겨우 친구 이름이 나영이라도 이렇게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나영이들 - 솔직히 '나영'은 너무나도 흔한 이름이다. - 의 마음은 어떨까?


꼭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도 사람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차라리,
가해자를 연상시키는 가명을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도리어
'철수아저씨 사건'이라고 붙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앗, 이름이 철수이신 분께 죄송합니다. 그냥 국어책에 나오는 이름이라 생각해 주세요. 꾸벅.)

어떤 이름(가명일지라도)을 사회에 어쩔 수 없이 회자시켜야 한다면,
피해자의 이름보다는 가해자의 이름을 회자시키는 게
피해자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지 않을까?
가해자에게도 심리적, 사회적 형벌이 더 크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우리도 회자, 즉 씹는 맛이 더 났을 것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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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에 강도가 들어 왔습니다. ‘손 들엇!’하며 칼을 들이댔습니다. 주인은 한 팔만을 번쩍 들었습니다. 강도는 ‘두 손 다 들엇!’하고 다시 소리쳤습니다. 집주인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왼쪽 어깨에 신경통이 있어서 팔을 들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신경통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하면서 강도의 음성이 누그려졌습니다. 그리고 강도가 증상을 묻습니다. 그래서 강도와 주인은 서로 자기의 증세나 치료 방법과  신경통이 주는 고통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부인은 차를 끓여오고 해서 아닌 밤중에 다정한 파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강도와 신경통>의 줄거리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인간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로가 고통을 나누고 서로의 약점을 나눌 때 강도는 어느새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집주인도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허물없는 사이가 되는 것은 이미 서로의 허물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랑하는 친구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로 짐을 함께 져주는 친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어에 communication 이란 단어를 기억할 것입니다.(우리말로 교통, 통신 등으로 번역되지만 근래에는 ‘인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넓은 뜻으로 교육, 문화영역에 많이 사용되고 있고, 정치에서도 요즘 ‘소통’이란 말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은 라틴어의 Munus 에다가 Com이란 접두사를 붙인 것입니다.) 라틴어(Commnunus)로는‘선물을 서로 나눈다’ ‘짐을 서로 진다’ ‘책임을 함께 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 사이에, 이웃사이에, 교우들 사이에, 그룹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질까요? 그것은‘짐을 서로 지고 사랑을 서로 나누면서’ 성경 말씀대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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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2009. 10. 1. 12:53
낙태가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재상영하면 꽤 좋을 것 같은 드라마다.

M 

<나는 널 몰라>
 
                                _ 최윤실
                                (1994년 노래 입니다..)


내 영혼이 아파오네
세월은 고독을
고독은 침묵을
침묵은 미움을
기다리고 있는걸
모르고서 시간은
흘러갔네

침묵속에 쌓여서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네
들리지 않아
어둠속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네
보이지 않아
나는 널 몰라

내 아픔이 사라질까
사랑은 슬픔을
슬픔은 좌절을
좌절은 눈물을
기다리고 있는걸
모르고서 시간은
흘러갔네

침묵속에 쌓여서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네
들리지 않아
어둠속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네
보이지 않아
나는 널
* 몰라(네가 누군지
네가 무언지
네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

출처 : 가사집 http://gasazip.com/198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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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보기 좀 불편한 고문 장면이 많지만-_-
그래도, 대단한 영화다.
코미디와 잔혹과 역사와 리얼리즘을 동시에 소화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

개봉 2003년 04월 04일
감독 장준환
출연 신하균 , 황정민 , 백윤식 , 기주봉 , 이재용 , 이주혁
상영시간 117분
관람등급
장르 드라마 , 코미디
제작국가 한국
제작년도 2002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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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동안에 영원히 볼 수 없는 니가 되었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어 니가 떠났던 건
눈물은 소용없다 사람들 말했었지
그래 다시는 울지 않을게
내 곁에 있다 생각을 할거야

지난 수많았던 기억속에 너를 떠올릴게
기억처럼 니가 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슬픔도 기쁨도 지나치지 말라던 너의 말
영원히 기억할거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 줘 이제는
편안히 숨쉴수 있는 곳으로 너 가도 돼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마 난 남아 있을거야
영원히 니가 바란 그모습 그대로 *
 

너 가기 전엔 할수 없었던
네게 정말 말해주고 싶던 것들을
이젠 얘기 할게

* ... *
:

오늘 공씨네 통해 들은 영화...
좋을 것 같다^^
나가서 다운받아 보자아~

헤어스프레이


개봉 2007년 12월 06일
감독 아담 쉥크만
출연 니키 브론스키 , 존 트라볼타 , 미셸 파이퍼 , 크리스토퍼 월켄 , 아만다 바인즈 , 퀸 라티파 , 제임스 마스덴 , 브리타니 스노우 , 잭 엘프론 , 엘리아 켈리
상영시간 115분
관람등급
장르 뮤지컬 , 코미디
제작국가 미국
제작년도 2007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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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필요없다.
꼭 읽어야 할 교양서!



 
지식E
저자 : EBS지식채널 | 출판사 : 북하우스(주)
2007.04.09 | 351p
:
* '인디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
개척이 아니라 학살과 멸종. 원주민 아니었으면 탐험가들 다 죽었다.

* 인디언에 대한 편견
: 원시, 정열, 미개, 동물적이고 야성적인 모습
but "그들은 예절바르고 훌륭하다."  _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밝은 노래 <인디언 보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인디언에 대한 미군의 마지막 대학살, 운디드니 학살을 읽고 있었다.
그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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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2002년 6월 7일 금요일, 22시 34분 지음

서초동 향나무

                                                       水鳳異

   

서초동
아침 10시. 도시의 소음이 응고되어 뿌옅게 가라앉은 도로.
서울의 혈관은 딱딱한 아스팔트 덩어리다.

향나무
문득 늘어선 가로수 사이에
낮게 웅크리고 있는 비석
누군가의 앞에서 무겁게 변명하고 있다.

약 860여년 된 이 나무는
나무는 시간 속에 홀로 서 있다.
오랜 세월 허옇게 센 껍질
까칠한 표면 속에 비밀스런 물관은
오늘 아침 첫 이슬을 머금고 있다.

높이 15.5m로 서울 시내에서
하지만 나무는 홀로만 우뚝하지 않는다.
곁에 있는 수십 년 된 어린 나무와
수백 년을 짊어진 이 나무는
같은 키다. 너는 속으로 나이테를
단단히 새겨 갈 뿐이다.

가장 크고 오래된 향나무로
허나 나무의 겸양의 香은
‘가장’이라는 수식어 하나로 가장되고
인간들의 퇴화되어 버린 후각은
어설픈 시각으로 마모된 표지판 글자만을 볼 수 있을 뿐

서울시 지정 보호수임
수백 년을 홀로 이겨내 온 네 생명력은
한순간에 보호 대상이 된다.
전시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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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만국의 노동자여


무슨 밥을 먹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밥에 따라 나뉘었다
그 밥에 따라 양심이 나뉘고
윤리가 나뉘고 도덕이 나뉘고
또 민족이 서로 나뉘고

그래서 밥이 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뇌의 생체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인류적이고
그래서 밥은 계급적이고  

밥의 나뉨은 또 식품문화적 구별도
영양학적 구별도 아니고
보편의 언어요 이념이요 과학이요 인식이다  

노동자의 가슴에
노동자의 피가 흐르는 것은
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남과 영남은
밥에 따라 다시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도
종교가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밥에 따라 다시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동서의 분단 남북의 갈라섬도
밥에 따라 다시 분단시켜야 한다

피땀 어린 고귀한 생산자의 밥의 나라냐
착취와 폭력의 수탈자의 밥의 나라냐

그대들의 무슨 밥을 먹는가
게으른 역사의 바퀴를 서둘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지상의 모든 노동자들이여
형제들이여!


풀씨 하나

이렇게 작은 풀씨 하나가
내 손에 들려 있다
이 쬐그만 풀씨는 어디서 왔나

무성하던 잎을 비우고
환하던 꽃을 비우고
마침내 자신의 몸 하나
마저 비워버리고
이것은 씨앗이 아니라
작은 구멍이다

이 텅빈 구멍 하나에서
어느날 빅뱅이 시작된다
150억년 전과 꼭같이
꽃은 스스로 비운 곳에서 핀다

이렇게 작은 구멍을 들여다 본다
하늘이 비치고
수만리 굽이진 강물소리 들리고
내 손에 내가 들려 있다.  

: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세월이 흘러
모든 것들이 변해가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
한참을 뛰어가다
돌아볼 때 어김없이
내 머릿 속을 뒤집어 놓는
아픔 속의 기억들

내게 상처가 된 당신의 거짓말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던 지난 날
그럼에도 존경받기를
원하셨던 그 모습에
내가 배운 것은
보잘 것도 없는 일 할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타인과 날 끊임없이 비교해대는 법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까지

나의 추억을
되돌려 놔 줘 uh
산산히 부서져 버린 꿈들과 yo
닫혀진 내 입과 억눌린 감정과
네게 짓밟혀 숨어버린
웃음까지 모두 다

내 외침이라도 들어 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인걸 uh
억눌렸던 모든 것들을
토해 저 위 하늘 향해
끝까지 난 외쳐 볼꺼야 uh



부푼 꿈 가슴 안고
첫발을 내딛을 때
누구나가 그렇듯이
설레임에 가득 찼지
온가족 함께 나와
모두 내 주윌 감싸
넌 잘 할 수 있을 거라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지

하지만 첫날부터
악몽은 바로 시작됐지
하늘 날던 꿈들은
땅속 끝으로 곧바로 추락했지
약자의 비굴함과
강자의 오만방자
아직 어린 난 그곳에서
악랄한 사회를 경험했지

내 인생의 책속 찢지 못한 페이지
내맘 깊은 곳 잊지 못할 그때지
담장 밖이 내게 준건 내 전부의 구할
담장 안 내가 받은것은 남은 일할
수많은 악칙과 악법
연필보단 주먹
동료가 되기 전에는 적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된 건
내가 가진 상상력을
이 많은 법들 앞에 굴복 시키는 것

나의 추억을 되돌려 놔줘 uh
산산히 부서져 버린 꿈들과 yo
닫혀진 내 입과 억눌린 감정과
네게 짓밟혀 숨어 버린 웃음까지 모두 다
내 외침이라도 들어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인걸 uh
억눌렀던 모든 것들을 토해
저 위 하늘 향해
끝까지 난 외쳐 볼꺼야 uh

(나레이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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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2006.11.12 10:57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 땅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웃들과 이웃들의 살결, 이웃들의 언어와 사랑과 한숨, 그리고 눈물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우리들이 빼앗긴 自由는 되찾아야 한다.


목숨 따위야 잡초처럼 살아날 수 있지만 자유는 귀한 것,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자유는 버릴 수 없다.



- 양성우, <겨울 공화국>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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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과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건 인정한다'그러나 거기에는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인정한다,그러나'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헌법해석은 대부분 '인정한다,그러나'쪽에 가깝습니다.
기본권에 대해서는 온통 공자님 말씀같은 좋은 말로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막상 구체적 사례에 들어가면 왜 그 권리가 제한될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하는데 10페이지를 할애한 법률책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똑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둘은 전혀 다릅니다.

헌법을 이해하는 열쇠말은'인정한다,그러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헌법은 '그림의 떡' 또는 '잘 포장된 한 장의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그러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것을 마음대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미 헌법이 아닌것이지요.

상당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헌법정신은 종교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위험을 감수할 만한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권한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하는 사제 계층에 관해서는 이미 한 번 언급하였습니다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정신은 그 반대지점에 위치한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을 읽고 해석한 권리를 인정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죠.
이단종파를 막고 교리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최고 기관에서 성경 해석권을 독점하고 다른 평신도들은 모두 그 해석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리에 어긋나면 모두 처벌하면 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손쉬운 방법 대신 평신도 모두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사제계급의 특권을 부인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물론 우리나라 개신교 목사들은 가톨릭 신부들 이상으로 성경해석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가톨릭은 교리문제에서도 개신교보다 개방적 입장을 보여줄때가 많지요)
당장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진리의 길이 바로 평신도 성경 해석권 인정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믿습니다.


종교의 자유도 똑같습니다.
다소의 위험이 있더라도 각자가 자신의 진리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위대한 정신을 일반적인 법률유보조항 하나로 한 방에 날리려고(무시하려고)하는 것은 헌법의 기초를 흔드는 위험한 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종교의 자유를 '내면적 신앙'과 '외적활동'으로 구분하고,
외적활동에 대해서는 실정법과 충돌할 경우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헌법학자들의 일반적 주장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서는 전형적인 '인정한다,그러나'의 정신만 발견할 수 있을뿐
도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차피 규제가 불가능한 내면적 신앙은 따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별로 침해받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었을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도 외적인 종교활동과 실정법이 충돌하면 무조건 실정법의 손을 들어주는 태도를 택하는것은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손쉬운 해석의 길을 선택한 덕분에 우리 헌정사에는 종교의 자유와 실정법이 충돌한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충돌이 있었다 하더라도 늘 일방적으로 실정법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전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종교란 그지없는 맹목입니다.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이어서 비종교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자기 눈으로 볼때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이상한 행동을 관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해 보이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 관용한다는 것은 이미 관용이 아니지요.
설사 종교의 자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 제한이 기본권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1)


사상의 자유라는것은 그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것 까지도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까지를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상의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다수파의 자유니까. -버나드 쇼


<중략>


1)인용은 김두식 저 [헌법의 풍경] 교양인 간.
2)인용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저서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김석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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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래는
참 찾기 힘들고 가사도 거의 없다...

                                                                                                                                


아이들의 마음은
하늘빛 꿈으로만 가득하진 않아요
어른들의 욕심이
자꾸만 병들게 하는 걸요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해요
아직은 때가 일러 바라보기만 하라고
어른들이 만들어준
이 공간에나 충실하라고

뭐라 말하려 해도
하얀 입김만 서려
이 거리는 더욱더
뚜렷해지기만 하는데

혼자만을 위해 주저앉지 말고
우리 함께 이 공간을 넘어

메마른 어린 가슴에도
새벽별이 숨쉬게 하자



혼자만을 위해 주저앉지 말고
우리 함께 이 공간을 넘어

메마른 어린 가슴에도
새벽별이 숨쉬게 하자

:

어제 기지브이에서 상영한 영화...
 
 
매우 저질스러운 영상 비율과 음향의 씹힘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눈이 아프고 귀가 따가운 걸 무시하고라도,
 
감동적이었다.
 
 
 
역시 체육인과 교육인을 합쳐놓아서 그런지...
이범수의 대사들이 너무 좋았다.
 
 
"동메달을 딴다고 해서 네 삶까지 동메달이 되는 건 아냐.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그게 바로 금메달이다."
 
"너희들이 내일 들어야 할 바벨이 아무리 무거워도,
너희들이 살아온 지난 삶의 무게보다는 가볍다."
 
 
 
그리고 늘 생각하는 화두 하나,
 
그 아이들의 "최선을 다하자"는 동기는,
목표의식은, 의지력은, 어디서 오나?
 
 
 
영화에서는 각자의 상처, 그로 인한 짓밟힘, 그에 따른 오기, 아니 생존 본능에 가까운 절박감이
그리고 그 절박한 눈물에서 나온 연대감이
그들을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방식만이 유일한가?
죽음과 절망과 눈물이 아닌, 사랑과 믿음, 기쁨을 통한 동기화는 불가능한가?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처럼 말이다)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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