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소리 http://www.badaksori.com/

영욱이형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된 창작판소리극 공연.
"제목이 뭐예요?"
"어 뭐... '닭들... 날다'였던가?"
이 말을 듣고 영화 '치킨 런'을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용보다는 창작판소리라는 것에 끌려서,
그리고 형이 "이분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라고 하는 추천에 이끌려서 공연을 보러 갔다.

대학로 정美소라는 공연장에 들어서자 마자, "1분 후 공연 시작합니다~"하는 소리. 다행이다, 하며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공연 전 설명부터 판소리로 시작되는 게 눈길을 끌었다. 그냥 건조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가락에 실어 말하는 것('아니리'라고 할 수 있겠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새삼 깨달았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반부에는 닭장 속에 갇힌 닭들이 금지된 꿈을 꾸다가 고생을 겪고 탈출하는 내용이었다. 거의 '치킨 런'을 연상시키는 내용. 그렇지만 사냥개, 그리고 닭반장의 말들이 현대의 우리 사회를 풍자적으로 반영한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에 깔려 있는 해학적인 요소들이 같은 내용이라도 좀더 판소리적인 분위기로 바꾸고 있었다. 닭할아버지가 닭 조상에 대해 설명할 때, '닭싸움'을 가져와서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싸움도 잘 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이 이야기의 상상력과 변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단초를 보여주고 있었다.
창의 가사도 새로웠다. 분명 가락은 판소리 가락인데, 가사 내용이나 어투는 현대적이었다. 특히 꼬끼가 꼬비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는, 가사만 들어보면 최신 가요의 이별 가사와 다르지 않았다. 전통적 음에 현대적 말. 약간은 어색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새로운 어울림. '어긋남의 합창'이라고 할까?

3장의 '트럭 운전사의 증언'에서는 해학적 아름다움이 매우 뛰어나게 드러났다. 역시 판소리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소리꾼의 재치와 능청스러움, 애드립이 빛을 발하는 장르이다. 그리고 혼자 하는 판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연극처럼 움직이는 판소리극이다보니,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닭들의 꿈, 날다'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이야기라고 주저없이 말하겠다. '닭들의 꿈, 날다'의 이야기는 깊이가 있지만 가라앉지는 않았고, 그저 웃기는 듯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며, 새로움 속에서 원전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야기의 깊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야기가 담고 있는 철학과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듯한 개그도 그 속에 뼈를 감추고 있으면, 자지러지게 웃고 나서 묵직한 깊이가 느껴진다.
'닭들의 꿈, 날다'는 현대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담고 있다. 통제된 사회, 꿈을 잃은 사회에 대한 건 물론이거니와, 비무장지대 안의 폭력과 파괴(지뢰밭), 분단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까지 드러낸다. 심지어 조류독감의 대유행과 그에 따른 닭들의 집단 살처분은, 마른 기침 한 번 해도 "당신 신종 플루 아냐?"라고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는 작금의 세태까지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이가 있는 작품은, 자칫 무거워질 수가 있다. 자신의 깊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없이 진지하게만 흘러가다가 진지함을 강요하게 되는 작품은 부지기수다. 잠수함이 내용물을 많이 실을 수록 그만큼의 공기도 많이 실어야 하는 것처럼, 문학작품도 깊이 가라앉을수록 부력을 일으킬 산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닭들의 꿈, 날다'는 그 산소를 해학에서 찾았다. 특히 판소리 특유의 해학미는 작품 전반을 감돌며, 관객들이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도록 만들었다.


'닭들의 꿈, 날다'가 더욱 대단한 것은, 웃음이 그저 해학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닭들의 꿈, 날다'에는 그냥 분위기 반전을 위한 웃음이 아니라, 닭, 독수리, 할머니 등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꼬끼'가 처음에 자신의 꿈을 밝히면서 "성대모사요!"라고 했을 때 그 엉뚱함에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성대모사가 작품 후반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쌍둥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전달해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변화했을 때, 웃음은 웃음을 넘어 희망으로 부상한다. 그 희망은 할머니의 죽음이 주는 슬픔까지도 새로운 원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 슬퍼하고 있는 멍구(강아지)에게, 꼬끼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어!! 우리가 그걸 전해주자!!!"라고 말하며 슬픔을 극복하게 만들지 않는가?(대사가 정확한지는...;; 이래서 대본이 필요해요ㅜㅠ)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상상력은 '닭수리'였다. 다리 없는 독수리와 날개 없는 닭이 함께 하늘을 난다니! 날개 있는 독수리와 다리 있는 닭이 함께 하늘을 난다니!!!
'닭들의 꿈, 날다'는 '없는'이 아니라 '있는'에 주목했다. '없는'에 주목하면 장애가 되지만, '있는'에 주목하면 가능성이 된다. 말로 하면 쉬워 보이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은, 정말 UFO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상상력은 절망으로 가득찬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다들 자신의 현실 속에서 부러지고 빼앗기고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만다.
그러나 상상하면, '있는'는 주목하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주류가 아무리 강력하고 폭력적이라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를 들면... 희망, 사랑, 상상력, 의지,,, 이런 것들......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런 엄청난 상상력이 원천이었는지, '닭들의 꿈, 날다'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많다.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보면,

"비무장지대는 완전무장지대야."
"새들이 많다고 해서 새들의 천국인 건 아냐. 그리고 인간들에게도, 천국은 아닌 것 같아."
"우린 살아온 공간, 살아온 과정은 다르지만, 살아온 흔적, 살아온 슬픔은 같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어!"


신기한 것은 그렇게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닭들의 꿈, 날다'가, 받아들이기 힘들다거나 버겁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상상력은 충격을 주고, 충격을 이질감을 준다. 그 이질감이 왜 '닭들의 꿈, 날다'에는 거의 없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변용, 다른 말로 패러디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닭들의 꿈, 날다'에는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한다. 처음에 UFO를 발견한 데에서는 패닉의 <UFO>를 떠올렸다(패닉의 <UFO> 역시 상상력이 대단한 노래이다. 짓밟히고 죽어간 사람들이 UFO를 타고 다시 되돌아온다는 발상.). 조류독감 때문에 흰 옷을 입은 방역대원들이 닭들을 집단폐사시킬 때는 영화 <괴물>이 연상되었다. 새다리골절전문치료사인 할머니, 새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할머니는 알다시피 <흥보가>를 변용한 것이다. 그 외에도 철조망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 만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나는 이산가족들(소설 <숨쉬는 영정>)은 모두 한국 문학 작품 속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모티브들이다. 그렇게 익숙한 원전들이 기반이 되어 '닭들의 꿈, 날다'가 만들어졌기에, 상상력이 거리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닭들의 꿈, 날다'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 쓸 말이 많아지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작품이다. 장르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한가지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연 날짜가 너무 짧았다는 것!

앞으로도 '바닥소리' 소리꾼들, 그리고 '닭들의 꿈, 날다'를 만드신 여러 재주꾼들의 힘으로,
이런 명작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나누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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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of La Mancha(라만차의 사람)  (0) 2009.10.21
:

 
침묵의봄
저자 : 레이첼카슨 | 출판사 : 에코리브르
2002.04.10 | 384p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일컬어지는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였다. 언론의 비난과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는 화학업계의 거센 방해에도 불구하고, 레이첼 카슨은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인식을 이끌어 내며 정부의 정책 변화와 현대적인 환경운동을 가속화시켰다. 즉,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환경 문제를 다룰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69년 미국 의회는 국가환경정책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암연구소는 ddt가 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발표하였고, 각 주들은 ddt의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침묵의 봄]을 읽은 한 상원의원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자연보호 전국순례를 건의 했으며, 이를 계기로 지구의 날(4월 22일)이 제정되었다.

출판사 서평



''환경''이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등장함으로써 그에 따른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고의 환경 도서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일컬어지는 <침묵의 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당히 부족한 형편이다.

지금도 시커먼 매연이 오염시키고 폐수가 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농약과 제초제라는 이름으로 독극물이 마구 뿌려지고 있다. 이것이 순간적인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연을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인간에게 결국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은 자명하다.

1962년에 띄어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이러한 우리의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은 들판에 뿌려지는 유독성 화학물질과 미국 야생 생태계의 광범위한 파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유독물질에 관한 책이다. 자연생태에 관한 것이며 환경과 동식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동물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이는 곧 아무리 인공적인 환경에서 살아도 자신의 기원인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여기에 실린 수많은 실례들은 비단 미국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남의 나라 얘기라고 흘려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일고 있는 유기농 채소 붐이 이를 반증해준다. 그것은 단순한 봄이 되어서는 안되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생존의 문제임을 깊이 깨닫고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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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미래
저자 : 헬레나노르베리호지 | 출판사 : 중앙북스(주)
2007.11.15 | 354p



 
어린이를위한오래된미래
저자 : 헬레나노르베리호지,박희은 | 출판사 : 중앙북스(주)
2008.10.24 | 213p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현대의 고전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의 어린이판!


1992년 발간 이후 전 세계 5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사랑받는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의 어린이판. 원작의 감동은 그대로지만 등장인물과 설정을 창작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췄다.
현대의 어린이들은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 생활하고 있다. 무엇이든 경쟁해야 하고,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환경 속에서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진정한 행복은 가족과 친구와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고, 자연이 주는 작은 선물에도 감사하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나온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분명한 목표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본문의 구성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에서는 엄마를 찾아 라다크로 날아온 꼬마 소녀 헬레나가 또래 친구 돌마와 그의 가족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2부에서는 라다크에 불어 닥친 서구화의 물결 속에 돌마네 가족이 도시 ‘레’로 이주해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개발이나 문명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3부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것과 경제개발이라는 대조적이지만 버릴 수 없는 두 개의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반개발이 아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의 내용
히말라야의 깊고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라다크! 까칠한 성격의 스웨덴 소녀 헬레나가 인도의 라다크까지 왔다. 이혼한 엄마에게 잔뜩 화가 나서 따질 게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올 때는 엄마와 함께 금방 떠날 셈이었다. 그러나 라다크는 헬레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라다크 소녀 돌마와 돌마의 가족이 베풀어준 따스한 사랑과 배려 속에 불편하기만 했던 라다크의 생활은 점점 아늑함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이곳에서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법, 자연을 아끼는 법,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되었고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라다크의 지혜는 헬레나에게 행복을 선물하게 된다.
:
57> "...가장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어떤 사람도 진짜 불쌍하지는 않아. 단지 불쌍하게 보일 뿐이지."

122> "네가 앞으로 살아가다 어떤 악당과 싸우게 되면 말이다, 넌 그 악당보다 훨씬 더 교활해져야 해. 그러려면 너는 그 악당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해. 알겠니?"

137> ...그래서 우리 시대의 낭만이란, '대단히 미안한 짓거리'이기 일쑤인 것이다.


196> "괜찮아. 그땐 내가 먼저 잘못했는걸 뭐."
우림이는 아픈 동안 너그러움을 배운 듯싶었다. 너그러움이야말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는 사실 또한. 그리하여 그 아이는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을 마침내 내 스스로 실토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너그러울 여유조차 빼앗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
하늘 같은 사람
               
                          / 법정 스님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권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늘 함께 있으면서
부딪친다고 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그저 날마다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삶에 녹이 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가꾸고 다듬는 일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면서 안으로 헤아리고 높이는 일에
근본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행복은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한 것으로 전락하는 세상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므로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아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또는,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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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초순 소들을 놓아먹이는 산꼭대기 풀밭에 사과나무 싹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두 해쯤 지나면 풀 뜯는 양떼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랍니다. 하지만 황소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어서 사과나무 가지가 한 뼘씩이나 갉아 먹히고는 해요. 한 20년 가량 이렇게 소에게 뜯어먹힌다는군요.
  사과나무는 한 가지를 갉아 먹힐 때마다 두 가지를 돋아나게 하며 옆으로 옆으로 퍼져갑니다. 쉽게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가시까지 돋게 하여 자기를 보호해 갑니다. 이렇게 20년쯤 위로 자라지 않고 옆으로 퍼지면서 자기를 지키던 사과나무는 더 이상 공격받지 않을 중심부에 어린 가지 하나나 둘이 돋아나게 합니다. 그동안 넓게 퍼지면서 응축해 온 생명력을 신생 가지에 쏟아부어 급속하게 자라게 합니다. 나무 아랫부분에 넓게 형성된 가지 무리 위로 사과나무가 본격적으로 자라 오르면, 역할을 다한 밑가지들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해칠 수 없는 소들이 우뚝 솟은 사과나무에 몸을 비벼대며 자기 그늘에서 쉴 수 있게 합니다.
  사과나무는 산꼭대기에서 겨울 찬바람을 스무 번도 넘게 견딘 강건함으로 당당하게 자기의 생명을 이어갈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의 인고를 지켜보며 함께 기도하였던 새들은 물론, 자기를 뜯어먹었던 소들까지도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합니다. 그리하여 발 없는 우리 야생 사과나무는 저 소들이 자기의 생명을 이어갈 어린싹이 멀리 퍼지게 할 협력자가 될 수 있게까지 합니다.(H.D.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참조)


 
시민의불복종
저자 : 헨리데이빗소로우 | 출판사 : 이레(도)
1999.08.10 | 212p
:
오늘 아침에 정말 우연히 본,
오랜만의 괜찮은 영화...

원작 소설도 있다는데, 제목은 찾기 힘들다.
읽고파ㅜㅠ

                                                                                                

남아프리카 출신 작가 브리스 코트네이(Bryce Courtenay)의 자전적인 소설를 근간으로, 한 소년의 성장 과정과 인종 차별에 대한 비판을 그린 작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무대로 백인 소년이 흑인들과 함께 자라면서, 권투를 통해 정신적 성장을 한 후에 흑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미국 개봉시의 평가는 보통이었다. 전반부에 비해서 후반부의 전개가 뒤떨어지고, 주제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다는 평이었다.


포스터
 
기본정보
드라마 |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 123| 개봉 1992.12.00
감독
존 G. 아빌드센
출연
스티븐 도프(P.K. 18세), 가이 위처(P.K. 7세), 시몬 펜톤(P.K. 12세)... 더보기
등급
국내 15세 관람가  
:
23> 그러나 이렇듯 교육열이 매우 뜨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66> 그런데 내가 제안한 이런 식의 초등교육을 충실하게 계획하고 즉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위원회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오직 한 가지, 나와 같은 강한 신념 뿐이다.

70> 글자에 의존하지도 않고, 또 정규 수업 방식이 아닌, 오로지 '이야기' 방식으로 가르쳐 보라.

78> 어린이 교육에 대한 기본적 생각

134> 생산적 작업

239>
- "모순이 없는 사람은 어린아이밖에 없다."
- 나는 현재 내게 진리로 보이는 것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 간디는 스스로 만든 원칙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였던 것이며, 이는 그가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는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40> "비겁과 폭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라면,
         나는 폭력을 선택하겠다."
:
* '인디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
개척이 아니라 학살과 멸종. 원주민 아니었으면 탐험가들 다 죽었다.

* 인디언에 대한 편견
: 원시, 정열, 미개, 동물적이고 야성적인 모습
but "그들은 예절바르고 훌륭하다."  _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밝은 노래 <인디언 보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인디언에 대한 미군의 마지막 대학살, 운디드니 학살을 읽고 있었다.
그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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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64> 샤이엔족에 대한 샌드크리크 학살

330~335> 투산 원정대의 아라바이파 마을 학살

432~438> 팰로 듀로 협곡에서의 학살

566~579> 퐁카 족에 대한 진전된 판결, 그러나 무시와 학살

689~696> 운디드니 학살

+ 각 장의 처음 부분에 있는 원주민들의 말 / 사진들
:
_ 2005.5.4 지음


<빌리 엘리어트>는 과연 해피 엔딩인가?

 

까만

 

지난 월요일에, 애들이 하도 안와서 결국 <빌리 엘리어트>를 봤다. 예상한 대로, 아이들은 “남자가 무슨 발레?”라고 비웃고, 영화 속의 동성애적인 코드에 거부감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만큼 나는 더욱 영화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함께할 수 있을까?

 

1. 빌리를 둘러싼 것들, 그리고 빌리.

빌리 엘리어트는 주인공 빌리의 성장 영화이다. 그러면 빌리는 처음에 어떤 공간에서 어떤 아이로 살고 있었나?

영화는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빌리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은, 탄광의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다. 즉 빌리는 전형적인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노동 계급’이라는 말 속에는 단지 가난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만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빌리의 집안은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이러한 남성 노동자의 전형(全形)이다.

그러나 빌리는 아버지, 형과 어느 정도 다르다. 물론 빌리 역시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져 온’―남성성의 대물림이 너무 잘 드러나지 않는가?―복싱을 배우고 있지만, 빌리는 복싱에 만족하지 않는다. 빌리는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가 남긴 피아노를 친다. 빌리는 복싱을 할 때도 마치 춤을 추듯, 리듬과 스탭을 탄다(물론 그러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2. 발레의 이중적 의미

빌리가 발레를 만나면서, 빌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문화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복싱을 그만둔 것, 그리고 발레를 둘러싼 아버지․형과의 갈등은 빌리의 저항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남자가 어떻게 발레를!”이라고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단지 빌리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빌리의 발레 교사인 윌킨슨 부인이 빌리에게 “너의 춤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빌리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져온다. 즉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것은 빌리의 집안에서 대대로 억압되어 왔던 여성적 문화가 드디어 스스로를 드러내고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화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발레의 의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영화를 주의깊게 본다면, 발레가 영화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혹시 기억나는지?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장면과, 빌리의 아버지와 형이 고함을 지르면서 파업하는 장면이 교차되는 씬을. 영화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빌리와,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빌리의 아버지․형을 대비시킨다.

발레는 여성적 관점에서는 해방이지만, 계급적 관점에서는 억압이 된다. 그것은 빌리가 발레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윌킨슨 선생의 계급적 성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발레 교사는 매우 부유한 집안이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쓸데없는 행동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빌리의 형이 발레를 반대할 때, 빌리의 형에게 “빌리를 당신같은 꼴이 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상류층 문화인 발레는 빌리가 기반하고 있는 노동자 문화와 충돌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문화적 충돌을 넘어서, ‘마음 편히 발레에 집중할 수 있는 가정 환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이이다. 윌킨슨 선생은 계속 빌리에게 “너는 집중하고 있지 않아.”라고 꾸짖는다. 어떻게 빌리가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와 형이 파업으로 힘들어하고, 형이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상황에서.

 

3. 빌리에게 주어진 발레, 빌리에게서 나온 발레.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빌리가 자신의 분노와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이 다시 ‘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때 ‘춤’은 ‘발레’와 다르다. 빌리가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추는 춤은 왕립 발레학교에서 요구하는 고품격의 우아한 발레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춤이다. 그래서 빌리가 즉흥적으로 추는 춤은 기존 발레와 다른, 빌리 자신의 몸짓이 들어간 춤이 된다.

빌리가 자연스럽게 발출하는 춤. 이것은 앞에서 빌리에게 ‘주어진 발레’가 가지는 이중성을 극복할 단초가 된다. 빌리에게 춤은 단지 상류층의 유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강제되는 억압을 극복하고 그것을 해방적 힘으로 발현하는 원동력이다. 아마 빌리가 조금 더 의식 있는 발레 교사에게 배웠다면, 빌리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춤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윌킨슨 선생은 빌리의 노동계급적 속성을 긍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빌리를 왕립 발레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빌리도 빌리의 가족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윌킨슨 선생은 빌리의 자발적인 ‘춤’을 왕립 발레학교라는 기존의 상류층 발레로 포섭해 버린 것이다.

 

4. 영광, 그 이면의 패배

그리고 영화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내가 ‘파국’이라고 쓴 표현에 의아해할 것이다. 빌리는 왕립 발레학교에 합격했고, 영화 마지막에는 <백조의 호수>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는 감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그런데 무슨 파국?

그렇다. 빌리는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어떻게 되었나?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를 위해 회사의 압력에 굴복해 버렸다. “우리 꼴을 봐라, 빌리마저 망칠 수는 없다.”고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그리고 빌리를 더 높은 계급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빌리에게는 기회를 줘야 해.” 이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바로 한국의 무수한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식들을 키우면서 한 말이다. 너희들에게는 기회를 줄게, 우리가 희생해서라도 너희는 잘 살아야 해.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인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라난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를 가는 것이 그 탄광 마을 전체의 경사가 되는 장면. 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마치 시골 깡촌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학생 한 명 생겼을 때의, 온동네가 잔치를 하는 그런 분위기. “빌리가 해냈어!”라는 환호와 “노조가 졌어.”라는 탄식이 교차될 때,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패배를 본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문화 자본의 차이는 더욱 크게 드러난다. 생전 처음으로 런던에 가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진 탄광밖에 몰라요.”라고 말하는 빌리. “한 번 떨어져도 내년에 또 하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부자 아이들과, 그 아이에게 주먹을 날릴 수 밖에 없는 빌리.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휘두른 빌리에게 품위와 규율을 강조하고, “가정의 절대적인 지원”을 강조하는 왕립 발레학교 심사위원들. 그런 문화 충돌 속에서, 빌리와 그의 가족들은 결국 상류층 문화에 편입되는 것을 선택한다. 아니 갈구한다. 처음에는 단지 좋아하는 발레를 하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나중에는 왕립 발레학교라는 명문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된다. 개인적 꿈이 사회 체제 안으로 너무나도 쉽게 포섭된다.

 

5. <빌리 엘리어트>는 과연 해피 엔딩인가?

영화는 빌리의 화려한 데뷔에서 정지하며,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으로 암전(暗轉)한다. 그러나 영화를 10분만 더 이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 탄광에서 올라온 빌리 아버지․형과, 상류층의 우아한 주인공인 빌리의 어색한 만남? 짧은 만남 후에 빌리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저택으로, 아버지와 형은 다시 탄광촌으로?

그것이 과연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결말일까?

 

어쩌면 감독은, 절망적 결말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싫어서 영화를 멈춘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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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만국의 노동자여


무슨 밥을 먹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밥에 따라 나뉘었다
그 밥에 따라 양심이 나뉘고
윤리가 나뉘고 도덕이 나뉘고
또 민족이 서로 나뉘고

그래서 밥이 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뇌의 생체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인류적이고
그래서 밥은 계급적이고  

밥의 나뉨은 또 식품문화적 구별도
영양학적 구별도 아니고
보편의 언어요 이념이요 과학이요 인식이다  

노동자의 가슴에
노동자의 피가 흐르는 것은
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남과 영남은
밥에 따라 다시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도
종교가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밥에 따라 다시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동서의 분단 남북의 갈라섬도
밥에 따라 다시 분단시켜야 한다

피땀 어린 고귀한 생산자의 밥의 나라냐
착취와 폭력의 수탈자의 밥의 나라냐

그대들의 무슨 밥을 먹는가
게으른 역사의 바퀴를 서둘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지상의 모든 노동자들이여
형제들이여!


풀씨 하나

이렇게 작은 풀씨 하나가
내 손에 들려 있다
이 쬐그만 풀씨는 어디서 왔나

무성하던 잎을 비우고
환하던 꽃을 비우고
마침내 자신의 몸 하나
마저 비워버리고
이것은 씨앗이 아니라
작은 구멍이다

이 텅빈 구멍 하나에서
어느날 빅뱅이 시작된다
150억년 전과 꼭같이
꽃은 스스로 비운 곳에서 핀다

이렇게 작은 구멍을 들여다 본다
하늘이 비치고
수만리 굽이진 강물소리 들리고
내 손에 내가 들려 있다.  

:
_ 2002.7.21 지음


일상에서의 운동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방금 서점에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끝내고 왔다. 다리 아프다…….

  이 책에는 대학,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해 잘 비판해놓고 있었다. 특히 대학 내부에서의 권력 문제를 읽으면서 정말 권력에 의한 착취는 어디에나 다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고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특히 많은 생각을 한 부분이 민족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박노자가 돈 잘 벌고 어쩌고 하며 표현한 작가의 책을 나오는 족족 사읽던 학창시절을 겪은 나였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정적 민족주의자 또 국수주의자였다. 물론 작년 말에 그 생각을 바꾸기는 했지만. 특히 윤관의 여진 정벌을 말하면서 그에 짓밟힌 소위 오랑캐들의 삶을 생각하자는 대목에서는 진짜로 뜨끔했다. 아직까지도 광개토대왕 하면 열광하던 나였으니…….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노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겪었다. 우리나라와는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 사회를 겪은 박노자다. 우리나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더 직시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나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구애받지 않고 비판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특히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대한 비판에서, 나는 이 글은 우리나라 사람은 못 쓸 글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박노자는 일상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 조교사건(?)을 겪고 그가 그날 밤에 했다는 생각―사회주의자라면 그런 행동에 대해 그 때 바로 문제제기를 했어야 했다라는―은 내게 일상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과연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의 일상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어떤 일이든 이면을 생각하라는 구절이었다. 한쪽이 승리하면 패배하는 쪽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 어쩌면 너무나도 이상적일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분명히 옳은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감상을 체계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냥 산발적으로 내 생각을 그대로 썼다.
 
미진한 글이나마 솔직함으로 포장하면서 글을 매듭짓는다.

:
_ 2001.10.25
반도문학회에서


수다스러움 + 메세지


수봉이^^;

커리: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솔직히 이 책을 읽은 지는 엄청나게 오래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책은 내 머리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작가를 생각했을 때 선뜻 이 작가를 추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선 소설의 구성은 화자가 형님에게 전화로 수다를 떠는 내용이다. 사실 처음에 수다떨기를 읽으면서 약간의 이질감도 느꼈다. 이런 형식 속에 과연 무슨 내용이 들어 있을까…하는. 아마 내가 ‘수다’의 이미지를 약간 나쁘게 보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완서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나목』, 『엄마의 말뚝2』, 그리고 『저문 날의 삽화』를 읽고 박완서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가벼움 속에 무거움. 그 무거움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투쟁을 하다가 죽은 아들을 둔 어머니. 그녀도 역시 민가협에 가입해 있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가식은 한순간 깨어지고 만다.

의식이 없지만 자기 어머니만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 그도 역시 한 시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다. 살아있기 때문에 느끼고, 그 어머니에게 반응한다. 그 장면을 본 순간, 주인공은 오열한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 죽음은, 그리고 생명은 은하수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절벽’까지도 울리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투쟁에 대한 말만 하고 있지 않다. 투쟁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 더 소중한 가치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무게를 잡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더욱 위대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번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박완서의 소설들이 모두 자기자신의 삶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일기처럼. 흔히 소설은 삶을 다루는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면 소설의 허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박완서. 결코 가볍지 않은 작가다. 요즘 여성들의 문학이 자꾸 개인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 이 작가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90년대의 개인주의도 이제 끝나고 새로운 천년의 문학이 자리잡아야 하는 지금, 이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줄 수 있을까.

 

*단어 정리
-운감(殞感): 제사음식을 귀신이 먼저 맛봄. 흠향(歆饗).
-민가협: 민주주의 실천 가족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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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풀의 <26년>에서 보고
완전 감동...


과거를 묻지 마라 그 누가 말했나
사랑이라면 이별이라면 묻지 않겠다
그러나 그러나

과거를 잊지 마라 절대 잊지 마라
반역자에게 학살자에게 용서는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수많은 세월 흘러도 상처 아물지 않는다.
그들이 아직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고 있는 한
수많은 원혼눈물로 구천을 떠돌고 있지만
그들은 권력의 담밑에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지낸다 안돼 안돼 안돼.

그들을 정의의 제단 앞에 세워야 한다.
한다.한다.한다.한다.



과거를 잊지 마라 절대 잊지 마라
반역자에게 학살자에게 용서는 없다.
없다.없다.없다.
 
수많은 세월 흘러도 상처 아물지 않는다.
그들이 아직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고 있는 한
시대를 강물처럼 살아온 불 같은 사람들
그 가슴에 뚫린 멍과 한과 탄식을
누가 누가 채워주려나 안돼 안돼 안돼

그들을 오월 영령앞에 세워야 한다.
한다. 한다.한다.한다.
한다. 한다.한다.
한다. 한다.
한다.
.

:
지난번 아우슈비츠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네만 선한 것들, 진실들, 정의들은 이상하게 아주 작아. 아우슈비츠는 크고, 그것을 묘사한다는 것은 "대서양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것처럼, 지구를 포옹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네. 폭력은 수용소처럼 거대하고 때로는 범국가적이지만, 사람을 살리게 하는 것들은 웃음들, 편지들, 따뜻한 말들, 혹은 한 통의 필름들, 하나의 작은 마음들, 진실을 향한 결단들 혹은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따스한 음성들…… 선한 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네.

- 공지영(2004), 귓가에 남은 음성, "별들의 들판", 창비, 93쪽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온몸으로 전율을 느낀 구절이다...
^^



* 「별들의 들판」
강추!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들」
:

 

_ 2006.11.12 10:57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 땅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웃들과 이웃들의 살결, 이웃들의 언어와 사랑과 한숨, 그리고 눈물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우리들이 빼앗긴 自由는 되찾아야 한다.


목숨 따위야 잡초처럼 살아날 수 있지만 자유는 귀한 것,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자유는 버릴 수 없다.



- 양성우, <겨울 공화국>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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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건 바로 그…… 총소리…… 총소리가 문제였어요…… 그 총소리만 나지 않았어도…… 그 총소리가…… 울려퍼지고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를 때 제 머릿속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아세요? (중략) 독침을 갖고 다니는 간첩, 괴물 모양을 한 김일성의 얼굴…… 그런 영상이…… 내 머릿속에 이런 영상들을 쑤셔막은 거예요…… 그 총소리가 울리면 그런 영상들은 유령처럼 되살아나고…… 나에게 총을 뽑게 하는 거죠…… 마치 우리 마음 어디엔가 스위치가 있는 것처럼…… 그런 총소리가 울리면 손전등 불빛을 본 마루처럼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중략)

무언가를 머릿속에, 마음속에 쑤셔박아 놓고 어딘가를 건드리면 터지도록 누가 설계해 놓은 것일까…….

- 박상연, 「DMZ」(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 소설), 248~249.
 
김수혁(영화 중 이병헌)의 말.



지금도... 우리 머릿속, 마음속에는 스위치가 있다.

전교조 / 집회 / 투쟁 / XX녀 / ......


다만 달라진 건, 자기 스스로 스위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


<아이들과 다룰 내용>
1. 소설과 영화 비교하기
- 인물 묘사의 차이 : 만약 소설 묘사 대로 인물을 캐스팅한다면, 어떤 배우/학생?
- 선택과 배제, 변환된 사건과 그 이유
- 중립국 장교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것의 의미
- 소설의 장점, 영화의 장점

2. '호명하기'의 관점에서 비평하기 : '형제'와 '적/동무'
-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 "동무...(머뭇거리다 다시) 형!!"
- "쟈들은 적이야 적!"
- "형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우린 결국 적이야."
:

원본 : http://isblog.joins.com/fivecard/228?category=0


'베토벤 바이러스'가 끝난지 2주가 지났습니다. 후속 드라마 '종합병원 2'도 시청률 고공 행진을 하고 있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2008년의 가장 인상적인 드라마 중 하나로 기억될 전망입니다. 시청률은 간신히 20%에 턱걸이한 정도였지만, 화제성과 파급력은 시청률 40%대를 넘나드는 드라마 이상이었습니다.

수천개의 기사와 블로그 포스팅이 쏟아졌고, 저도 이 드라마와 김명민이 연기한 강마에 캐릭터의 인기 원인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해괴한 주장들이 발견되더군요. '우리도 강마에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마에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인가' 하는 류의 주장들이었습니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강마에 리더십'이라고 부를만한 긍정적인 부분이 발견된 일이 있던가요? 실력만 좋으면 자신의 지휘하에 놓인 사람들을 그렇게 공깃돌 놀리듯 다뤄도 되고,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만 하면 칭찬받아 마땅한 것일까요? 문득 20여년 전의 또 다른 신드롬이 생각났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글은 '베토벤 바이러스'에 열광한 모든 시청자들에 대한 글이 아닙니다. 바로 위에서 말했듯 '비정상적으로', '강마에 리더십'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입니다. 이 점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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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마에의 외인구단', 그렇게 마음에 드시던가요?

 1983년, 대한민국 곳곳의 만화 대본소에서는 비슷한 대화가 수없이 오고 갔다. "'외인구단' 9권 나왔어요?" "네. 나왔어요." "어디 있어요?" "지금 누가 보시는데. 줄 섰어요. 기다리세요."

이현세의 장편 극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30권으로 완간될 때까지 당대 대중문화의 코드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만화에 친숙했던 10대들이, 곧이어 대학생을 거쳐 사회인들까지도 이 만화의 영향권에 흡수돼 버렸다. 1986년 이장호 감독이 만든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도 원작 마니아들에겐 혹평을 받았지만 그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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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이었을까.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자. 한국에도 프로야구라는 것이 생긴지 얼마 안 됐을 즈음, "강해져라, 그럼 아무도 너희를 무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손병호라는 광적인 지도자가 야구계의 루저들을 불러 모은다.

주인공 까치를 비롯한 여섯 명의 선수들은 무인도에서 손 감독의 지휘로 1년 동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 무적의 야구 전사로 거듭난 뒤, 꼴찌 구단과 단체 계약을 한다. 조건은 후기리그 50전 전승에 1인당 2억원씩(당시 물가로는 서울 시내 아파트 5채 값 정도 된다)의 보너스를 맞바꾸는 것. 물론 구단주는 야구에서 50전 전승이란게 가능할 리 없으니 날로 먹는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차근차근 목표를 달성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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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토리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손병호 감독의 메시지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돈 없고 가방끈 짧고 빽 없어서 한탄하던 사람들에게, 유능하고 집념에 불타는 지도자가 나를 단련시켜 최강의 승부사로 거듭 나게 해 준다는 얘기가 더없이 매력적인 판타지로 여겨진 거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얘기 아닌가? 최근 한국 시청자들은 어중이 떠중이 단원들에게 "이기적이 되어라. 남들을 위해 희생해서 얻은 게 뭐냐"고 강변하는 한 곱슬머리 지휘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들의 볼멘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니들은 내가 연주하는 악기일 뿐"이며, 심지어 "니들은 그냥 개고 난 주인이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짖으라"고 소리친다. 이런데도 차츰 단원들은 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간다.

물론 현실에선 어림없는 얘기다. 그래도 실력은 있으니 따르는 거 아니냐고? 강마에는 커녕 카라얀이 다시 살아 온다 해도 이런 막말을 참고 견딜 단원들이 있을 리 없다. 야구 감독이라면 당장 선수들이 태업에 들어간다. 담임 선생님이 이런 식이면 교육청에 신고할 학생들이 줄을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년 전 '외인구단' 분위기 그대로 '강마에 신드롬'이 등장한 건 무슨 이유일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다. 즉, 내가 성공하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다. 머리 좋게 낳아 주지도, 엄청난 재산을 물려 주지도 않은 부모 탓이며, 일찌기 재벌 2세와 초등학교 동창이 되지 못한 탓이고, 욕설과 구타를 퍼부어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유능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강마에는 자녀들을 과외로 뺑뺑이 돌리는 학부모들과도 코드가 맞는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렇게 신경써서 교육했다면 내가 뭐가 되어도 됐을 것"이므로, "우리 애들이 나를 똑같이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혹독한 강훈으로 아이들을 단련시키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이 나중에 부모님이 바로 강마에였다는 걸 알아 줘야 할텐데. 글쎄다.

아무튼 온 세상이 강마에를 동경하는 사람들 판인 걸 보면 세상이 지나치게 빨리 변한다 싶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공포의 외인구단'도 내년에 드라마로 나온다던데, 무대를 입시학원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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