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수원에서 열리는 화성문화제에 다녀왔다. 정조대왕 행차를 시연하는 데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근처 부대에서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우선 주말에 밖에 나갈 수 있다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었고,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걸 여기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냐고 생각했다.

우리는 정조의 엄마인 혜경궁 홍씨의 가마꾼이었다.
'꾼'이라고 하니까 낮아보이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행차의 중심이었다. 우리 바로 앞에서 왕이 말 타고 가도록 되어 있고, 우리는 혜경궁 홍씨와 가장 가까이 붙어서 행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인 것이다. 솔직히 기침 한 번 잘못 해도 안 될 위치였다. 게다가, 우리 옷은 다른 허접한 옷들과는 달리 노란색(겨자색)으로 햇빛 받아 찬란히 빛나는 옷이었던 것이다!

10시쯤 종합운동장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행사 시작 예정인 2시까지, 간식 먹고 점심 먹고... 얼굴에 먹칠 조금 한 것 외에는 할 일 없이 빈둥댔다. 다행히 영욱이형한테 라디오를 빌려갔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너무 무료해서 죽을 뻔했다.

드디어 2시.
행사 시작 시간이다. 나인들, 포졸들, 우리 주위를 호위해 줄 붉은 옷의 무사들(칼, 창, 활은 기본이고.. 핼버드-왜 그 시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를-와 망치-정말 무식하게 생겼다-까지 있었다.), 그리고... 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말 탄 사람들까지 지나갔다. 심지어 Osan Air Base에서 온 U.S. Army까지 있었다. 그리고 태국, 말레이시아, 그 외 다양한 나라의 행렬들까지 지나갔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2시 30분. 무료하고 지쳐서 막 졸고 있으려니, 정말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부인(?) 한 분이 오셨다. 그분이다. 혜경궁 홍씨.
그분은 역시나 첫인상부터 달랐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타?"
아... 우리가 밀고 갈 '이런 거'.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 밀어드릴게요... 하고 속으로 툴툴댔다. 올라가려니 너무 높다. "계단 어딨어?" 어리버리한 스탭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리가 가마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가마 밑 문을 열고 계단 비스무리한 것을 끄집어 내었다. 올라서면서 또 하는 말.
"여기 왜 이리 낮아? 머리 망가지잖아!"
"여긴 방석도 하나밖에 없네!"
"근데 권 실장은 왜 안 보여? 오늘 안 보이네?"
다들 뭐 씹은 표정으로 가마를 잡았다. 모두들 '이거 확 급발진이라도 해버릴까부다...'하는 표정이었다.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왕이 탄 말이 이상했다. '이히히히히힣힣힣~~' 정말 난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울고 투르르대고 앞발 구르고... 위에 탄 왕이 사색이 되었다. 슈퍼맨도 말에서 떨어져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는데, 왕이라고 다를쏘냐? 보아하니 말을 끄는 말구종이 초짜 알바생인가 보다. 당연히 말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거다.
왕이 말 대준 사람을 찾았나보다.
"어이 김형, 이거 말이 왜 이래? 바꿔 줘야지~"
"어... 그거 우리 말 아냐. 요기(왕 바로 뒤의 말)부터 우리 말이여. 우린 50%만 댔다구~"
헛웃음만 나온다. 왕도 대한민국 공무원 앞에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내 관할이 아니라는데 뭘. 왕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한다.

2시 50분. 드디어 행렬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왕까지 출발하고, 이제 우리가 출발한다. 이 가마, 생각보다 잘 간다. 커브도 꽤 유연하게 틀어지고...
"깡!"
웬 깡통 쪼개지는 소리! 난 가마 바퀴에 깡통이라도 깔린 줄 알았다. 그러나, 아뿔싸, 쪼개진 건 깡통 쪼가리가 아니라, 가마 바퀴였다!!
이 가마라는 놈이, 앞바퀴에 방향 조절 할 수 있도록 회전하는 기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쩌랴, 커브는 틀어야 하고, 바퀴는 틀어지고, 틀어진 채 힘이 가해지니, 별 수 있겠나. 꺾어지는 수밖에.

행렬은 점점 앞으로 가는데, 우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분의 명언들.
"이거 뭐야! 가마 가져와!!"
"권 실장 어딨어? 권 실장 불러와!!!"
"(옷깃을 떨치며) 나 안 해! 나 이거 안 해!!!!!"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이러면 내가 무거워서 부서진 것 같잖아...!"
"나 내려갈래! 나 내려 줘!!"
어디선가 쫓아온 좀 높은 스탭(권 실장인가? 아마 아닐 거다. 이런 위기 상황에 나타날 실장이 아니지.)이 설득한다.
"아이고 어머니 이러시면 안돼죠... 고정하세요... (똘마니 스탭들 돌아보며) 야이 병X X끼들아, 가마 안 끌고와???!!!!"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던 독일인, 연이어 플래시를 터트리며,
"She is angry, isn't she?"
하도 부끄러워서, 옆에 있던 현호가 이렇게 말했다.
"They are japanese......;"

결국 다들 어찌어찌 떠나가고, 우리와 부서진 가마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지만 부서진 가마도 제 역할은 톡톡히 했다. 지나가던 외국인들, 행인들, 가마에 한 번씩은 기웃거려보고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재밌게 놀았으니까. 우리도 제 역할은 톡톡히 했다. 저녁으로 제공된 조미료 투성이 갈비탕을 맛나게 먹어주었으니까. 후식인 박하사탕이랑 아이스크림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화성문화제.
정말, 잊지 못할 만큼 재미있고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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