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전에서 본 일이다.
늙은 박사 하나가 산단(産團)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열 장 짜리 연구계획서를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계획서로 혹 주관기관 신청이 가능한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산단 직원의 입을 쳐다본다. 산단 직원은 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계획서를 슥 넘겨보고는 '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계획서를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얼마를 가더니, 이번에는 연구재단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럭거리다가 그 계획서를 내놓으며
"이것이 정말 예비선정된 것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연구재단 직원은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계획서, AI로 작성한 거 아니지?"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럼 남의 것을 훔쳤단 말인가?"
"누가 유사도검사에 걸릴 짓을 한답니까. 걸리면 제재는 안 받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박사는 손을 내밀었다. 연구재단 직원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보며 얼마를 허덕이고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핸드폰을 꺼내서 홈페이지에 적힌 '예비선정' 넉 자가 진짜인가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거친 손바닥이 액정 위를 스와이핑할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핸드폰을 손바닥 위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심사소견에 심취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느 심사위원이 그렇게 많이 칭찬해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재단에 투서하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베낀 것이 아닙니다. AI로 돌린 것도 아닙니다. 저 같은 가난뱅이 박사가 유료 API를 어떻게 돌립니까? 전산자원 지원 한 번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KCI 학술지 한 편 게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편 한 편 쌓은 업적으로 몇 개의 계획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계획서로 신진연구인력, 저술지원, 학술연구교수 A, B 등을 몇 번이나 지원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해 반복하여 겨우 이 귀한 학술연구교수 A-2 유형 예비선정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판정 받느라고 넉 달짜리 강의도 포기했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학술연구교수가 되려 한단 말이오. 그 사업으로 무엇을 하려오. 교수 임용이라도 되려 하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저, 월급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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