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2009. 9. 6. 15:00

0.

2시간 넘는 상영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영화관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까지... 최근 들어 본 영화가 많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 끝까지 다 보고도 일어나기가 싫었던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러브홀릭스의 <Butterfly> 때문이리라. 글 쓸 때 음악은 절대 듣지 않는 나인데도, 지금 집중력 감퇴를 무릅쓰고 배경음악으로 깔고 글 쓰고 있다. 집중력 좀 희생하더라도, 어제 영화를 볼 때 느낀 "심장의 소리"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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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의 정석 공식을 잘 따른 영화다. 비인기 종목의 열악한 환경, 각각 장애와 상처를 가진 선수들, 그들을 모으는 감독, 피나는 훈련과 극복, 인간 승리의 결말까지. 어찌 보면 너무 통속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로 공식을 그대로 대입했다.

그러나 공식을 대입했다고 해서 영화가 공식처럼 건조하지는 않다. 틀 안에 있다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물들의 삶의 리얼리티가 높았기 때문이다. 입양으로 인해 무국적자("넌 투명인간이냐?")로서 살아가는 밥 혹은 차헌태(하정우님). 약물 복용이라는 과거 전력과, "차분하지 못한" 성격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는 최흥철(김동욱님).  가난과 질병(귀먹은 할머니와 정신지체로 보이는 동생), 그리고 군 입대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강칠구(김지석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조선족(인지 중국인인지;) 아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마재복(최재환님). 그리고 실패투성이 인생을 사는 방 코치(성동일님)까지. 이들의 절실하고 진정성있는 삶이,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을 글썽이게 한다.


1.2.

이들의 장애가 극도로 표면에 부상하는 순간이 바로 대표팀이 해체 위기를 맞을 때이다. 영화는 그들이 다시금 방황하고 좌절의 경계선까지 밀려나가는 모습을 한 명 한 명씩 보여준다. 특히 최흥철이 약물 복용을 위해 약국에서 감기약을 다량 구입하는 것은, 그들이 스키점프를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좌절과 죽음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약국에서, 약사(오광록님)의 한 마디가 국면을 전환한다. "겨울 비가 내리네."


'비'는 문학적 상징성이 대단한 소재이다. 특히 겨울비, 찬비. 이것은 고통이자, 고통을 용해시키는 용매이다. 비는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의 틈바구니에 스며들어, 응고된 한(恨)을 녹이고, 사람들 사이를 화해시킨다. 그리하여 선수들은 꽁꽁 막고 있던 자신들의 상처를 해소하고,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강봉구(이재응님)가 비를 맞는 장면은 쇼생크 탈출을 연상시켰다.) 마지막에 감독까지 자신에게 내리는 비를 가리고 있던 우산을 벗어버린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우산의 그늘에서 벗어나, 비를 함께 맞는 것이다.


1.3.

개인 안에 박혀버린 상처와 장애를 어떻게 해소하고 극복할 것인가? 영화는 이런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의 무게 때문에, 영화가 자칫 비극과 신파 일변도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균형 잃음을 막기 위해, 영화는 코미디의 양념을 '매우 잘' 활용한다.

특히 강봉구의 희극적 행동은 영화의 조타수 역할 혹은 브레이크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하다. 강봉구를 약간 바보스러운 인물로 설정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바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예상가능한 행동 양식을 뛰어넘는다. 형이 스키를 부수고 난리를 치면서 절규할 때, 봉구는 "내 꺼야!"라고 하며 도망치다가 넘어짐으로써 분위기를 전환한다. 조폭이 칼 꽂고 협박하면서 영화를 액션 영화의 코너로 몰아갈 때,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할 때(솔직히 난 차헌태가 멋있게 복싱으로 나쁜 놈들을 제압할 줄 알았다;), 봉구는 "어이없게도" 조폭 두목을 후려갈기고 도망친다. 영화 마지막에 차헌태가 어머니가 준 설탕 토마토와 어릴 적 앨범을 보면서 보는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을 때도, 봉구는 어머니가 주신 소중한 토마토를 마구 집어먹는 용감한(?) 개입을 함으로써 영화를 신파에서 휴먼드라마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구해낸다.

이 정도면 강봉구 없는 「국가대표」를 설탕 안 뿌려진 토마토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1.

물론 「국가대표」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특히 영화의 지나친(?) 국가주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화 마지막에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을 보자. 물론 이 애국가가 군국주의적인 승리를 위한 애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조차 차헌태(이미 귀화해서 한국인까지 된)가 따라부를 수 없는, 참여할 수 없는 애국가를 넣은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차헌태는 결정적인 귀화 시험에서 떨어진 거다.

나아가 차헌태에게 귀화를 강요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자신을 버린 나라'에 귀화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찾을 수조차 없다. 국민이 되지 않으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모자 관계도 지키기 어려운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정말 백번 양보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미 제목 자체가 「국가대표」인데, 뭘 더 바라겠냐-_- 하지만 대안 없이 그저 '애국가'에만 의존하는 대중주의적 감성은, 내 생각에는 좀 더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최소한 마지막에 차헌태가 따라 부를 수는 있게 말이다.(뭐 스키점프 예찬가 혹은 어머니 마음 이런 노래 없나?;;;)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는 굉장한 영화다. 특히 후반부의 스키점프 경기 장면은 손에 땀을 쥐고 심장이 터질 듯한 벅찬 느낌을 주었다. 상상도 되지 않는 무한대의 속도감, 그 정점에서 허공으로 점프, 날아올라, 그리고는 정지. 활강 순간의 정지된 화면,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 혹은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아찔한 눈밭, 그리고 착지하는 순간의 안도감까지. 스키점프는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다. 그리고 스키점프를 통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대표"하게 되는 선수와 코치 모두,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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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감동이 지금 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사실 아까 부인이 아침밥 해 달라고 한 지 1시간이 지났습니다. 얼른 글을 마무리해야하는데도, 쓰다 보니 어제의 감동이 더해져서 글이 길어졌네요. 이런 감동을 선물해 주신 공씨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부대 복귀해서도 늘 라디오로 듣고, 가능한 한 종종 글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글이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요^^;;;;




언제나 좋은 방송 감사해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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