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숲글
#6247번_제보
5월30일 11시가 되어가는 밤 낙성대 역을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길. 우산이 없었던 나는 그냥 정류장을 향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우산 씌워드릴까요?"
빗속에서 다들 걸음을 재촉하기 바쁜데 따뜻한 배려였고 특히나 나에겐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떠오르는 기억들에 아득해져 오늘 우산 한켠을 내어준 그분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다.
비오는 밤
나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 밤과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교복을 입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밤 비가 쏟아졌고 우산이 없던 나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거리를 걸었다.
축축한 옷, 이미 물이 새어 들어간 핸드폰과 가방, 얼굴에 붙어오는 젖은 머리카락, 축축함을 비집고 들어오는 서늘한 추위. 그리고 데리러 오는 사람도 함께 갈 사람도 없었던 외로움.
쏟아지는 비와 추위보다 한 발자국 걸을때마다 밀려오는 외로움이 더 싫었다. 외로움을 외면하고싶어 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꿋꿋이 걸었다.
그렇게 나는 누가 퍼붓는것 마냥 쏟아지는 비에 내가 비인지, 비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젖어들었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비에 축축히 젖은 나를 하나 둘씩 스쳐가고 인적 드문 길로 들어서던 때였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이 조금 편해지려는 찰나 빗소리 틈새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산 씌워줄까?'
우산은 이미 내 머리위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애는 그렇게 물었다. 참 다정한 목소리로.
처음보는 사람이 말을걸어 당황했고, 놀랐고, 교복을 입고서 비 한방울 맞지 않은 그 애의 모습에 괜한 반발심이 들었던 나는 '벌써 다 젖었는데' 라는 퉁명스러운 한마디만 내뱉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앞으로 걸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머리 위의 우산.
처음보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퉁명스러움에도 그 애는 친절을 베풀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며 나를 따라오는 내 머리위의 우산에 나는 멈춰섰다.
비를 피했기 때문인지, 그 애 곁의 온기 때문인지 문득 따뜻함이 느껴졌기에.
퉁명스러움을 거두고 말했다.
'나 완전 젖어서 같이 쓰면 너도 젖어 진짜 괜찮아'
그러자 그 애는 잠시 멈춰있더니 '그러네' 하며 우산을 확 내 손에 건네버리곤 뛰기 시작했다.
지금 자기도 젖겠다는건가 그 애가 뛰는걸 보다 나도 우산 가져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 애를 향해 뛰었다.
우산을 들고 빗속을 뛰는데 비는 다 들어오고 우산이 있어도 비에 젖는건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까와 똑같이 빗속에서 젖어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애는 뛰는 나를 보더니 멈춰섰고 둘 다 비에 젖은채로 꾸역꾸역 우산 하나를 나눠쓴채 그 애는 처음보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렇게 친구가 됐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우린 함께였다. 가끔 비가 쏟아지면 우린 우산 없이 뛰며 정신 없이 웃었고 처음 만난 그 날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흰 교복 셔츠 위로 참 희었던 그 애의 얼굴을, 나와 만나면 멀리서부터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다가오던 그 웃음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학생이 되어도, 나이를 더 먹고 직장인이 되어 정장을 입고도 비가 오면 이렇게 나랑 뛸거라는 너의 말을 웃어넘기지 말걸. 꼭 그러자고 대답해줄걸.
나에게 교복을 입은 너의 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게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난 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데.
비가 내리는 날 다가와 비가 내리는 날 떠난 너.
내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 비가 내리면 우산이 되어주고 바람이 불면 벽이 되어주던 너.
외로웠던 나에게 손을 뻗어주고 니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살도록 해준 너.
비가 쏟아지는 밤 우산이 없어도 난 망설임 없이 빗속을 걸어.
'우산 씌워줄까?' 하는 다정했던 너의 목소리가 다시 나에게 들려올까봐.
니가 다시 돌아올까봐. 널 만날 수 있을까봐.
너와의 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비가 오면 짙어지는 너의 기억에 다시 젖어보고싶어서.